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내 꿈은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놀이는 성경 구절 외우기였다. 철자 맞히기 대회처럼 돌아가며 한 구절씩 외우다가 한 사람만 남을 때까지 계속했다. 마지막 사람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만난 누구보다 많은 구절을 외웠다.
목사가 종종 집에 들렀지만 성경 암송으로는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보다 몇 배 많은 구절을 알았다. 일곱 살에는 설교문을 써서 아버지의 인쇄소에서 조판했다. 기도 모임에서도 짧은 설교를 자주 했다. 모두 내가 장차 뛰어난 설교자가 되리라고 보았다. 학교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뽑혔다. 졸업 논문의 주제는 야망이었다. 야망을 얼마나 격렬히 비난하고 가난과 봉사를 얼마나 간절히 옹호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다음 여름에는 시골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일요일마다 설교했다. 학교는 집에서 12마일 떨어져 있었지만 짐을 들고 걸어갔다. 학교 이사회에는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사회 의장이자 지역의 지도자는 거실 구석에 놓인 위스키 한 통 덕분에 명성을 얻었다. 미시간호에서 난파된 배의 짐이 해안으로 떠밀려 온 것이었다. 그는 술을 후하게 나눠 주었고 집은 지역 사람의 본부가 됐다.
방의 다른 가구라고는 장작 난로와 비누 상자 세 개뿐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 앉아 글을 모르는 의장에게 내가 교사 자격이 있다고 설득했다. 마침내 연감에 실린 우스갯소리를 읽어 주어 성공했다. 그 작은 책자가 그의 도서관 전부였고, 내가 소리 내 읽는 모습은 그에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또 하나의 교훈이었다. 내가 평생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만 상대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아주 소박한 사람을 많이 상대했다.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반응을 알고 사랑한다.
이제 보수를 정할 차례였다. 여름학교는 두 달 동안 열 예정이었다. 회계 담당자의 집으로 가서 학군 재정을 세어 보았다. 전부 79.50달러였고 그것이 내 교사 보수가 됐다.
새 오르간을 들여놓은 농가를 찾았다. 그 집에는 연주를 배우고 싶어 하는 딸이 둘 있었다. 숙식을 제공하면 음악을 가르치고 내가 매주 1달러까지 보태겠다고 했다. 그 여름 한 달에 35달러를 저축했다. 사업을 시작한 뒤에도 그만큼 저축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일에는 교사였고 일요일에는 목사였다. 날마다 사람에 관한 새 교훈을 배웠다. 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알겠지만 내가 평생 가장 많이 배운 주제는 사람이다.
여름이 끝나자 시카고로 갔다. 어머니는 브라이턴 파크의 밀스 박사 집에 머물고 있었고 나도 합류했다. 도착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다. 오후에 목사가 찾아왔다. 몸이 아픈 데다 다음 날부터 긴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날 밤 설교가 몹시 부담스럽다고 하자 어머니가 목회 지망생인 내가 대신하면 된다고 제안했다.
위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어머니의 엄격한 종교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의 나를 알면 어머니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알았다. 어머니는 근본주의자였다. 인격을 가진 악마와 지옥불, 모든 기적을 믿었다. 어머니에게 성경은 저자들이 신의 영감을 받아 쓴 역사책이며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지구는 엿새 만에 창조됐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어머니의 우상이 됐을 것이다.
나는 정통 신앙에서 멀어졌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름 동안 내 종교관에 맞춘 설교문을 준비했다. 내게 금지됐던 삶의 해롭지 않은 즐거움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지옥불과 유아의 저주, 내가 겪은 종교 훈육에 반대했다. 창조 이야기와 요나와 고래 이야기에도 의문을 던졌다.
그날 밤 설교하고 결과를 감당하기로 했다. 열여덟 살이었다. 그 뒤로 그렇게 큰 위기에 맞선 적은 없다. 목사가 되지 않으면 학업도 끝난다고 생각했다. 진로를 결정하려고 시카고에 왔고, 이 설교가 시험이었다.
그날 저녁 설교단에 선 순간은 지금도 아주 선명하다. 청중은 800명이었고 평균 나이는 내 두 배였다. 그러나 모두 잊었다. 머릿속에 있던 청중은 어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뒤에 앉은 목사가 어머니의 친구이며 같은 정통 신앙을 지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극단적인 급진주의자처럼 느꼈다. 그 뒤로 그렇게 한마음인 반대에 맞선 적은 없었다. 내 삶에서 가장 대담한 사건이었다.
설교가 이어질수록 목사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청중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설교가 끝나자 목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축도를 했다. 사람들은 말없이 줄지어 나갔다. 나를 맞아 주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끌고 싶었던 무리에서 내가 추방됐음을 알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집까지 걸었다. 그날 밤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갈림길에 이르렀다는 것은 알았다. 다음 날 어머니는 시내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디어본가의 식탁에 앉자 어머니는 내가 더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더 들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왔다. 그곳에서 목사의 길로 통하는 문을 영원히 닫았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다시 예전 같지 않았다. 내 일탈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날 뒤로 거의 만나지 않았다. 내가 다른 일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살아서 보았지만 그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머니의 꿈을 꺾었다.
광고가 종교만큼 억압적인 일이 됐다면 광고도 버렸을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이유로 큰 고객을 여러 차례 떠났다. 누구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아 불행해지는 분야에서는 성공할 수 없다. 나는 사업을 경기로 여기고 경기처럼 한다. 지금까지 사업에 깊이 빠져 살았고 여전히 좋아하는 이유다.
운명을 바꾼 그날 디어본가에서 주머니를 뒤져 보니 3달러뿐이었다. 저축한 나머지는 미시간에 두고 왔다. 삼촌의 과수원이 있는 스프링레이크가 떠올랐다. 과일을 따는 철이었으므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항구로 내려가 보니 머스키건에서 온 목재 운반선 몇 척이 있었다. 그중 한 배의 선장이 주방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바다를 건너게 해 주었다. 머스키건에서 스프링레이크까지 걸었다. 삼촌과 다른 농장주의 과일을 하루 1.25달러에 따기로 했다. 그 돈과 교사 시절 저축을 합치니 100달러가 넘었다. 하지만 상업학교에 다니려면 200달러가 필요했다.
삼촌 집에서 함께 살던 외할아버지는 내가 일하는 모습을 좋게 보았다. 나를 ‘끈기 씨’라고 불렀다. 농장에는 동갑내기 사촌까지 소년이 둘이었다. 나는 하루 16시간 일했고 사촌은 가능한 한 적게 일했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돕기로 했다. 가진 돈은 장례비로 모은 100달러가 전부였다. 돌아가시면 장례 비용을 내가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그 돈을 내주었다. 물론 받아들였다.
경력의 또 다른 갈림길이었다. 비슷한 나이의 손자가 둘 있었고 알려진 능력에는 차이가 없었다. 나는 신앙에서 벗어난 아이여서 집안의 못마땅한 시선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100달러를 모았고 열심히 일했다. 다른 소년은 모은 돈이 없고 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인생의 물길을 바꾼 도움은 내게 왔다. 사촌은 증기기관차 화부가 됐다.
그 뒤로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기회를 쥔 사람은 저축하고 일하는 사람을 먼저 택한다. 그 선택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때가 많다.
200달러를 들고 그랜드래피즈로 가서 스웬스버그 상업학교에 들어갔다. 우스운 학교였다. ‘스웬스버그 교수’는 스펜서식 필체를 멋지게 썼다. 그 한 가지 자격으로 상업 교사가 됐지만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사업은 글씨 쓰기가 전부인 듯했다. 대학에서 죽은 언어를 공부하며 여섯 달을 보냈어도 다를 게 없었다. 장부 담당자로 졸업한다면서 배운 회계라고는 딱딱한 숫자 몇 개뿐이었다.
실제 교사는 웰턴이라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그를 ‘웰턴 교수’라고 불렀다. 그는 나중에 건물 관리인으로 죽었다. 가르치는 방법은 학생을 조롱해 하찮은 존재로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말끝마다 빈정거림이 흘렀다. 가장 좋아한 고문은 누구도 쓸 수 없는 함정 단어를 섞은 철자 시험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가망 없는지를 보여 주려 했다.
한번은 charivari라는 단어를 넣었다. 아무도 철자를 맞히지 못했다. 사전을 찾아 다음 날 가져오라고 했지만 누구도 찾지 못했다. 그가 예상한 일이었다. 첫 세 글자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바보인지 실컷 말했다.
스웬스버그 교수는 아침마다 강연했다. 목적은 역시 우리를 낮추는 데 있는 듯했다. 높은 의자에 앉아 늙어 갈 장부 담당자에게 겸손은 좋은 자격일지도 모른다. 그의 겸손 수업은 과정을 마치면 주급 4.50달러짜리 일자리가 기다린다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깨우침도 격려도 없었다. 높은 자리에서 학생을 향해 조롱과 비꼼만 던졌다. 그래도 우리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것 같기는 하다. 스웬스버그 졸업생에게 그보다 많이 주는 사람은 돈을 낭비하는 셈이었다.
과정과 돈이 함께 끝나 가자 농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스웬스버그 교수가 엽서 한 장을 들고 와 강연 주제로 삼았다.
“주급 4.50달러짜리 자리가 어딘가에서 여러분을 기다린다고 자주 말했지요. 이제 실제 증거가 있습니다. 우편요금을 아끼려고 편지가 아니라 엽서로 왔습니다. 그랜드래피즈의 한 사업가가 주급 4.50달러를 받는 장부 담당자가 필요하니 지원자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지는 마십시오. 원하는 사람은 강연 뒤 내 사무실로 오면 이름과 주소를 알려 주겠습니다.”
다른 학생은 웃었다. 자기들이 무가치하다는 새 농담으로 들은 것이다. 나는 문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다. 교수가 강연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바로 한 계단 뒤에 있었다.
그는 E. G. 스터들리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주었다. 스터들리는 그랜드래피즈 펠트 부츠 회사의 관계자였다. 장부를 맡던 젊은이가 공장 감독으로 승진해 후임자가 필요했다. 새 감독이 내 자격을 인정하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를 찾아가 자리를 얻었다. 장부 일은 작은 부분이었다. 바닥을 쓸고 창문을 닦아야 했다. 심부름도 맡았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절대로 재킷을 입지 않는 것이었다. 감독은 민주적인 사람이어서 곁에 멋쟁이를 두고 싶지 않았다. 사무실에서도 시내 심부름을 할 때도 셔츠 차림이어야 했다. 남은 셔츠가 두 벌 있었으므로 자격은 충분했다.
이제 주급 4.50달러로 사는 문제가 남았다. 집에 남자가 있기를 바라는 과부에게 작은 방을 구했다. 주당 1달러였다. 식료품점 위 식당에서는 초라한 남자가 초라한 식사를 주당 2.50달러에 내놓았다. 그마저 감당하기 어려웠다. 빨래 비용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끼를 거르고 2.25달러에 먹기로 합의했다.
젊고 활동적이어서 늘 배가 고팠다. 어느 끼니를 거를지가 큰 문제였다. 아침을 건너뛰어 보니 눈을 뜰 때부터 굶주렸다. 점심을 거르면 오후 일을 망쳤다. 유일한 방법은 저녁에 식당 앞을 달려 지나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길 반대편으로 건너지 않으면 그것도 불가능했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내 직장에서 그토록 중요한 셔츠 차림을 잊고 들어갈 것 같았다.
가엾게 들리지만 그렇지 않았다. 삼나무 늪에서 살던 때보다 크게 나아졌다. 철도 노동자와 건초더미에서 자는 대신 침대 하나를 혼자 썼다. 올라가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려가기 시작하면 대리석 저택에서 조금 싼 궁전으로 옮기는 일조차 괴롭다.
펠트 부츠 회사는 그랜드래피즈의 유력 사업가들이 세운 곳이었다. 판매는 겨울에만 일어났으므로 여름 내내 돈을 빌려 재고를 준비했다. 이사가 회사 어음에 보증을 섰다. 내 임무 가운데 하나는 이사를 돌며 보증과 갱신 서명을 받는 일이었다. 그렇게 비셀 카펫 청소기 회사의 사장 M. R. 비셀을 만났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에게서 더 높은 급여를 받을 기회를 보았다.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을 막아섰다. 주급 4.50달러로 사는 젊은이의 어려움을 그려 보였다. 과장할 필요가 없었다. 매주 두 끼를 굶어야 한다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그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파이에 관한 꿈을 이야기했다. 저녁에 파이를 주는 식당을 알았지만 식비가 주당 3.50달러였다. 그 시절 내 가장 큰 야망은 그 파이를 먹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인간 본성의 또 다른 굴곡을 배웠다. 분투와 가난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도 잘 겪어 보았고 젊은이에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파이를 좋아했고 파이를 먹지 못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를 집으로 초대해 파이를 먹였다. 날마다 파이를 먹을 수 있도록 급여를 주당 6달러로 올려 주는 일도 주선했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이 장에서 홉킨스의 첫 취업을 결정한 것은 화려한 자격이 아니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주급 4.50달러 자리에 가장 먼저 움직인 속도였다. 그 뒤 비셀에게 더 높은 급여를 얻은 것도 “돈이 부족하다”는 추상적인 호소가 아니라 “일주일에 두 끼를 굶고 파이를 먹지 못한다”는 구체적인 장면이었다.
채용과 세일즈 모두 비슷하다. ‘열정이 있다’거나 ‘비용을 줄여 준다’는 말은 흐릿하다. 지원자가 입사 첫 주에 고칠 문제, 제품을 쓰고 사라질 수작업, 고객이 되찾을 시간처럼 눈에 잡히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홉킨스의 근면 예찬은 그대로 따를 처방이 아니다. 대신 기회를 알아보고 남보다 빨리 작은 행동을 취한 부분을 보자.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보다 실제 고객에게 한 번 더 보여 준 사람이 더 빨리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