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력에서 가장 큰 사건은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일어났다. 아버지가 스코틀랜드계 여성을 내 어머니로 택한 일이다. 어머니는 그 민족의 절약과 신중함, 지성과 야망과 활력을 아주 강하게 지닌 분이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서 많은 자질을 물려받는다고 한다. 나도 분명 어머니에게서 두드러진 보수성을 물려받았다. 내가 아는 한 그 자질의 부족 때문에 무너진 광고인과 사업가가 다른 어떤 이유로 무너진 사람보다 많다.
이 사실은 책에서 거듭 강조할 것이다. 여기서 먼저 말하는 것은 내 신중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밝히기 위해서다. “안전 제일”은 줄곧 나를 이끈 별이었다. 광고업에서 경력을 쌓고 싶은 소년에게 스코틀랜드계 어머니보다 큰 자산은 없다. 절약과 조심성이 본능이 되기 때문이다. 두 자질은 토대다.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면 그것 없이 성공하기 어렵다. 다만 타고나지 못했더라도 부지런히 익히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내가 본 사업의 파국은 대부분 지나친 욕심에서 생겼다. 숨어 있는 기회에 무모하게 베팅하고, 신중함을 비웃으며 서두르고, 경쟁자가 더 멀리 또는 더 높이 갈까 두려워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내달린 결과였다.
일반 사업에는 예외가 있을지 모르지만 광고에는 없다. 광고의 재난은 모두 경솔함에서 생긴다. 불필요하고 변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불가능한 시도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편견과 특이한 취향을 상대한다. 그것을 정확히 잴 수는 없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절반 넘는 경우를 늘 옳게 판단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신중하지 못한 태도는 광고에서 죄가 된다. 새로운 광고를 시작할 때마다 내용물을 모르는 자루를 사는 셈이다.
보통의 실패는 큰일이 아니다. 당연히 생긴다. 광고를 처음 집행하는 단계는 대중의 맥박을 짚는 시험에 가깝다. 반응이 없다면 제품이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문제가 있을 때가 많다. 제대로 진행한 시험이라면 손실도 작거나 거의 없다. 뜻대로 되지 않은 희망과 아이디어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건일 뿐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파국이다. 거대한 투기가 무너지는 일, 광고인이 크고 비싼 배를 암초로 몰고 가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무모하다고 판명된 조타수는 오래도록 불신받는다. 가능성이 많던 광고인 수십 명이 지도에도 없는 항로에서 돛을 모두 펴고 달리다가 배와 함께 망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내 안의 스코틀랜드 피가 35년 동안 나를 그런 재난에서 지켜 주었다.
어머니 덕분에 내 눈에는 10센트가 1달러만큼 커 보였다. 내 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돈도 마찬가지였다. 소유주일 때든 맡아 관리할 때든 조심해서 썼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큰 도박을 벌인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저지른 수많은 실패는 나에게 큰 흠이 되지 않았다. 눈에 띄는 참패가 낳는 불신을 피했다. 질 때는 돈을 조금 잃었고 신뢰는 잃지 않았다. 이길 때는 고객에게 수백만 달러를 벌어 주고 내 명성도 크게 높였다. 대부분 어머니에게 빚진 일이다.
어머니에게 받은 것은 훨씬 더 많다. 부지런함을 배웠다. 밤이든 낮이든 어머니가 일하지 않는 모습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을 나온 총명한 분이었다. 남편을 잃은 뒤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자녀를 부양해야 했다. 수업 전후로 집안일을 했고 저녁에는 학교에서 쓸 유치원 교재를 썼다. 방학이면 학교마다 걸어 다니며 그 책을 팔았다. 서너 사람 몫의 일을 하면서 서너 개의 경력을 동시에 일궜다.
나도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시와 격려를 받아 그렇게 살았다. 아홉 살부터 내 생활비를 스스로 벌었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하루의 일로 여겼지만 내게 수업은 하루 중 한 부분일 뿐이었다. 수업 전에 학교 두 곳의 문을 열고 난로에 불을 피우고 자리를 닦았다. 수업이 끝나면 바닥을 쓸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65가구에 《디트로이트 이브닝 뉴스》를 배달했다.
토요일에는 학교 두 곳을 닦고 전단을 돌렸다. 일요일에는 교회 관리인으로 일해 이른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바빴다. 방학에는 농장으로 갔고 하루 노동시간은 16시간이었다.
의사가 학교에 다니기에는 몸이 너무 약하다고 진단했을 때는 삼나무 늪으로 갔다. 새벽 4시 30분에 일이 시작됐다. 아침을 먹기 전에 소젖을 짜고 가축에게 먹이를 주었다. 6시 30분에는 점심을 들고 늪으로 향했다. 종일 장대를 자르고 철도 침목을 다듬었다.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젖을 짜고 가축이 밤을 보낼 자리를 깔았다. 밤 9시가 되면 사다리를 타고 다락의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그래도 내가 힘들게 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훗날 사업에서도 똑같았다. 정해진 근무시간이 없었다. 자정 전에 일을 끝내면 휴일처럼 느껴졌다. 새벽 두 시에 사무실을 나설 때가 많았다. 일요일은 방해받지 않아 가장 일하기 좋은 날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뒤 16년 동안 저녁이나 일요일에 일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내 방식을 따르라고 권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아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겠다. 삶에는 성공보다 더 소중한 일이 많다. 적당히 일하는 편이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다. 그래도 동료보다 두 배 오래 일한 사람은 두 배 멀리 갈 수밖에 없다. 광고에서는 특히 그렇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마다 지능의 차이는 있지만 부지런함의 차이만큼 크지는 않다. 남보다 두세 배 일한 사람은 두세 배 더 배운다. 실수도 성공도 더 많이 겪고 양쪽 모두에서 배운다. 내가 광고에서 남보다 높이 올라갔거나 더 많은 일을 했다면 특별한 능력보다 특별히 긴 노동시간 덕분이다. 한 직업에서 뛰어나려고 삶의 나머지를 희생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러워하기보다 가엾게 여길 삶이다.
한번은 연설에서 광고업에 70년을 썼다고 말했다. 달력으로는 35년뿐이지만 보통 노동시간과 해낸 일의 양으로 따지면 한 해에 두 해씩 살았다. 절약과 신중함이 재난을 막아 주었다면, 부지런함은 광고를 가르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아버지에게서는 가난을 물려받았다. 그것도 축복이었다. 아버지는 목사의 아들이었고 먼 조상까지 모두 목사였다. 가난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집안이었으니 가난은 아버지에게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그 덕을 많이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수가 많은 평범한 사람들 곁에서 살았다. 그들의 욕구와 충동, 분투와 살림살이, 소박함을 알게 됐다. 잘 알게 된 그 사람들이 훗날 내 고객이 됐다. 글로든 말로든 이야기하면 그들은 나를 자기와 같은 부류로 알아보았다.
부유한 사람에게는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자가 사는 물건을 팔아 본 적도 없다. 롤스로이스나 티파니 제품,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광고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부유층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안다. 노동자와 이야기하고, 동전을 하나씩 세어야 하는 주부를 살피고, 가난한 소년소녀의 신뢰를 얻어 그들의 포부를 듣는 일을 좋아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게 주면 마음이 울리는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내 말은 쉬울 것이고 문장은 짧을 것이다. 학자는 내 문체를 비웃을지 모른다. 부유하고 허영심 많은 사람은 내가 내세우는 특징을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수백만의 소박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내 글을 읽고 물건을 살 것이다. 글쓴이가 자기들을 안다고 느낀다. 광고 고객의 95퍼센트가 그들이다.
편집자 주 홉킨스의 ‘평범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당시 미국의 백인 노동자·주부를 중심으로 한 범주다. 대중을 잘 안다는 자신감은 강력한 관찰에서 왔지만, 오늘날의 시장을 하나의 보편적 소비자로 뭉뚱그릴 근거는 되지 않는다.
가난 때문에 판매를 배울 경험도 했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외판원이 되지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돈을 쓸 때 드러내는 본성을 거기서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방문 판매는 훌륭한 학교다.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광고인 가운데 한 사람은 인쇄물로 팔기 전에 늘 직접 팔러 나갔다. 농부의 관점을 배우려고 몇 주 동안 농장을 하나씩 찾아다녔다. 여성의 관점을 얻으려고 초인종을 1천 번 누른 적도 있다.
가난해서 대학에 가지 못했다. 이론의 학교 대신 경험의 학교에서 4년을 보냈다. 광고인이 대학에서 배울 만한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실무에 나서기 전에 잊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경우는 많이 보았다.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을 사람에게 고등교육이 장애가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학창 시절에는 광고, 판매, 언론 과목이 없었다. 지금도 없는 편이 낫다고 확신한다. 그런 강의안 몇 개를 읽어 보니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고 사람을 잘못 이끌어 화가 날 정도였다. 한번은 이름난 기술학교의 광고 강의안을 가져온 사람이 고칠 점을 물었다. 읽고 나서 나는 말했다.
“태워 버리십시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소중한 청년의 4년을 이런 허튼소리로 채울 권리는 없습니다. 이런 이론을 4년 배우면 잊는 데 12년이 걸릴 겁니다. 그때는 경주에서 너무 뒤처져 따라잡을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요.”
그때 나는 몹시 화가 나 있었고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교육기관의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보낸 교수가 광고나 실무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런 일은 실제 사업의 학교에 속하며 다른 곳에서는 배울 수 없다.
나는 이 문제를 수백 명과 이야기했다. 교육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력자에게 후광을 씌우는 사람들의 엉뚱한 행동도 보았다. 대학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를 직접 들었다. 내 집안이 대학과 가까웠으므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갔다. 나는 대학 캠퍼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대학을 나왔고, 외할아버지는 대학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누이와 딸도 대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 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계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을 셀 수 없이 지켜보았다. 내가 이끈 광고대행사는 사환까지 대졸자로 뽑았다. 내 고객 가운데도 대졸자만 채용하는 방침을 세운 사람이 많았다. 고용주에게 없는 훈련을 받은 사람을 쓰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위까지 올라간 사람은 한 명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기간을 실무에 쓴 사람이 압도적으로 앞섰다. 광고에 관한 한 농촌 사람과 한 주 이야기하는 편이 내가 아는 어떤 강의실에서 1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많이 가르쳐 준다.
편집자 주 이 대목은 1920년대 광고교육을 향한 홉킨스 개인의 판단이다. 오늘날의 대학 교육 전체에 적용할 근거는 아니다. 다만 고객과 만나지 않은 채 고객 연구를 가르칠 수 없다는 비판은 여전히 날카롭다.
윌 칼턴은 내가 목사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이끈 사람이다. 나는 당연히 목사가 될 아이였다. 조상 대대로 목사 집안이었고, 내 이름도 목사 인명록에서 골랐다. 가족은 내가 설교단에 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훈련이 지나쳤다. 외할아버지는 엄격한 침례교도였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였다. 두 사람은 종교를 숨 막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일요일마다 예배에 다섯 번 참석했다. 저녁에는 지루한 설교를 들으며 잠들지 않도록 누군가 나를 꼬집었다. 일요일은 황량했다. 산책도 못 했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성경과 성구사전뿐이었다. 성구사전이 맞는지 확인하느라 성경의 낱말과 글자 수를 세며 하루를 보냈다. 그 밖에 읽은 책은 《천로역정》이었는데, 소년이 따라가고 싶을 만한 길을 알려 주는 책은 분명 아니었다.
삶의 즐거움은 모두 죄처럼 보였다. 춤추고 카드놀이를 하고 극장에 가는 사람은 악마의 편이라고 배웠다. 주일학교에서 주지 않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내세가 기다린다고 했다.
윌 칼턴은 아버지의 대학 동창이었다. 〈언덕 너머 빈민원으로〉를 비롯한 유명한 발라드를 썼다. 미시간주는 최근 그의 생일인 10월 23일을 해마다 학교에서 기념하는 날로 정했다. 그는 어린 내 우상이었다.
내가 아홉 살이나 열 살 때 칼턴은 순회 강연을 다녔다. 우리 도시에 오면 집에 묵었고, 지나치게 종교적인 집안 분위기가 소년에게 좋지 않다고 보았다. 한번 다녀간 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발라드를 썼다. 《도시의 노래》에 실린 〈그의 마음이 들어갈 방은 없었다〉였다. 감옥으로 가는 길에 한 청년이 보안관에게 털어놓는 사연이었다. 종교가 광신이 된 스코틀랜드 장로교 가정과 억압에 몰려 범죄를 저지른 소년의 이야기였다. 칼턴은 그 종교적 비극의 희생자 자리에 나를 놓고 책을 보내 주었다.
그 발라드는 가족이 가르친 모든 것보다 내 진로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칼턴을 존경했고 커서 그처럼 유명해지고 싶었다. 우리 집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은 물론 내 생각과 같았다. 그런 인물이 내 편에 서자 내 생각에도 무게가 생겼다. 그 뒤로 칼턴은 나를 이끄는 별이 됐다. 종교적 광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세상에 다른 관점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보여 주었다.
그래도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는 계속했다. 열일곱 살에는 설교자가 됐고 열여덟 살에는 시카고에서 설교했다. 하지만 칼턴이 시작한 생각의 흐름 때문에 결국 종교인의 길을 갈 수 없었다.
또 하나의 사건이 큰 영향을 주었다. 누이와 내가 앓았을 때 어머니가 간호해 주었다. 회복하는 동안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어 주었다. 얼마 뒤 그 연극이 마을에 온다는 말을 듣고 전단을 돌리는 대가로 표를 받았다. 오래 설득한 끝에 어머니도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을 허락했다.
공연은 일주일 뒤였다. 시간은 납처럼 무겁게 흘렀다. 마침내 그날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하루가 끝나지 않을 듯 길었다. 저녁 일곱 시가 되자 누이와 나는 더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를 재촉해 마을 회관으로 나섰다.
가는 길에 장로교 목사를 만났다. 그는 자기 어린 시절을 잊은 노총각이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피했다.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재앙이 닥칠 것 같았다.
그가 말했다. “자매님, 산책을 나오셨군요. 어머니와 자녀가 이렇게 완벽히 어울리는 모습은 참 보기 좋습니다.”
어머니가 답했다. “예, 산책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아이들이 아팠고 회복하는 동안 제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주 깊이 빠졌지요. 오늘 밤 그 연극이 마을에 오고 이 아이가 표를 벌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 책보다 나쁠 수는 없을 테고, 그 책은 분명 세상에 큰 선을 이루었으니까요.”
목사가 답했다. “논리는 알겠습니다. 마음도 이해합니다. 그 책이 큰 선을 이룬 것도 사실이지요.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언젠가 아이들은 자매님의 보호를 벗어납니다. 악마의 극장이 불을 밝히고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모습을 보게 되겠지요. 그때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어머니가 첫 연극에 데려갔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는 “옳은 말씀입니다. 내가 나쁜 본보기를 보여서는 안 되겠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한순간에 어머니가 상징하던 것에 대한 존경을 잃었고,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내게 놀라운 영향을 준 사람이 또 있었다. 하루 1.60달러를 받는 철도 선로 작업반장이었다. 그가 거느린 노동자 몇 명은 하루 1.25달러를 받았다.
여섯이나 일곱 살까지 나는 놀고 있는 대학생에 둘러싸여 있었다. 학생 생활의 진지한 면은 몰랐고 장난만 보았다. 그래서 삶 전체가 놀이터라는 생각을 제법 굳게 품었다.
작업반장은 그 생각을 뒤집었다. 그는 자신과 부하의 차이를 강하게 보여 주었다. 부하들은 먹고살기 위해 일했다. 가능한 한 적게 하고 퇴근 시간만 셌다. 토요일 밤이면 도시로 나가 한 주 동안 번 돈을 모두 썼다.
반장은 신이 나서 일했다. “여러분, 오늘 침목을 이만큼 놓아 봅시다. 이 구간을 멋지게 끝냅시다.” 사람들은 일이 지겨운 듯 묵묵히 움직였지만 그는 일을 경기로 만들었다.
하루 10시간 철도에서 일한 뒤 저녁에는 자기 집을 지었다. 둘레에는 정원을 가꾸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서 가장 예쁜 여성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 나중에는 더 높은 자리로 불려 갔다. 그 전에 나는 이미 그에게 큰 교훈을 배웠다.
그가 말했다. “저 아이들이 야구하는 걸 봐. 저것도 힘든 일이야. 나는 지금 지붕널을 얹고 있어. 시간과 경주하는 중이지. 오늘 몫을 채우려면 해 지기 전에 어디까지 덮어야 하는지 알아. 이게 내가 생각하는 놀이야.”
“저 사람들은 나무를 깎으며 철도를 논하고 정치를 이야기하지. 철도에 관해 아는 거라야 못을 박는 법이 전부인데 말이야. 늘 그 일만 하고 더 나아가지 못할 거야. 그들이 오늘 저녁 빈둥거리는 동안 내가 한 일을 봐. 현관을 거의 다 지었어. 곧 나는 여기 편히 앉아 예쁜 아내와 사랑을 나누겠지. 그들은 언제나 식료품점 난로 옆 비누 상자에 앉아 있을 거야. 어느 쪽이 일이고 어느 쪽이 놀이지?”
“쓸모가 있으면 일이라 부르고 쓸모가 없으면 놀이라 부르지. 둘 다 똑같이 힘들어. 어느 쪽이든 경기로 만들 수 있어. 경쟁이 있고 남보다 잘하려는 싸움이 있지. 내가 보는 차이는 마음가짐뿐이야.”
그 말을 잊은 적이 없다. 그 사람은 내게, 제임스 루시가 캘빈 쿨리지에게 했던 역할을 했다. 이제 나도 쿨리지가 했던 말로 그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훗날 나는 미국 자원봉사자협회의 이사가 되어 삶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조사했다. 무료 급식소와 감옥에서, 가석방 상태에서 그들을 만났다. 가장 큰 문제는 게으름이 아니라 놀이를 지나치게 사랑한 데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놀이를 잘못 이해했다.
그들 대부분은 젊을 때 깨어 있는 시간을 모두 무언가에 썼다. 다만 어떤 사람은 공을 던졌고 다른 사람은 옥수수밭을 맸다. 어떤 사람은 당구공을 포켓에 넣었고 다른 사람은 주문서를 주머니에 넣었다. 한쪽의 홈런은 분필로 기록됐고 다른 쪽의 홈런은 돌에 새겨졌다. 차이는 무엇을 재미로 여겼느냐에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골프를 사랑하듯 일을 사랑하게 됐다. 지금도 그렇다. 사무실에서 저녁 몇 시간을 보내려고 브리지 게임과 저녁 식사, 무도회를 거절한 적이 많다. 주말이면 시골집 손님들 사이에서 몰래 빠져나와 타자기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놀이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일을 좋아하는 마음도 기를 수 있다. 두 말은 서로 바꿔 써도 된다. 사람은 가장 좋아하는 일을 가장 잘한다. 폴로 공을 쫓는 일을 좋아하면 그 일을 잘할 가능성이 크다. 경쟁자를 장군처럼 몰아붙이거나 가치 있는 일에서 홈런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쪽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젊은 사람이 평생 할 일을 자기가 아는 가장 흥미진진한 경기로 볼 수 있다면 대단히 큰 자산이다. 실제로 그래야 한다. 운동 경기의 환호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성공에서 오는 환호는 무덤까지 따라간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홉킨스가 이 장에서 내놓는 강한 주장은 세 가지다. 큰 실패를 피할 만큼 작게 시험하라. 고객 곁에서 고객의 언어를 배워라. 일을 오래 하는 것보다 더 빨리 배우는 구조를 만들어라.
마지막 문장은 원문과 일부러 다르게 읽어야 한다. 홉킨스에게 긴 노동시간은 더 많은 시도와 학습을 뜻했다. 오늘의 팀은 밤샘 자체가 아니라 실험 주기를 짧게 만드는 도구와 데이터로 같은 이점을 얻을 수 있다. 주당 노동시간을 두 배로 늘리는 대신 고객 인터뷰, 작은 배포, 빠른 회고의 횟수를 두 배로 늘리는 편이 낫다.
또 하나 남는 경고가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을 안다”는 확신은 쉽게 오만이 된다. 창업자의 성장 배경은 강력한 관찰 렌즈이지만 시장 전체를 대신하지 않는다. 친숙함을 근거로 추측하지 말고 실제 고객을 계속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