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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9 · 03

2부 진실보다 승리를 원하는 마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답은 인간 본성의 천박함에 있다. 인간이 천박하지 않고 철저히 명예로웠다면, 모든 토론의 목표는 오직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진리가 내가 처음 내놓은 견해를 지지하는지, 상대의 견해를 지지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가장 큰 관심사다. 우리의 타고난 허영심은 지적 능력에 관한 일이라면 특히 예민하다. 처음 내놓은 내 입장이 틀렸고 상대가 옳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난관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해 보인다. 언제나 올바르게 판단하려고 애쓰면 된다. 그러려면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타고난 허영심은 수다스러움, 정직하지 못한 마음과 함께 붙어 있다. 그들은 생각하기 전에 말한다. 나중에 자기가 틀렸고 주장이 거짓임을 깨달아도 겉으로는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싶어 한다.

처음에 참이라고 여긴 명제를 내놓을 때만 해도 유일한 동기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었을지 모른다. 이제 그 자리를 허영심이 차지한다. 허영심을 지키기 위해 참인 것은 거짓처럼, 거짓인 것은 참처럼 보여야 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보기에도 거짓인 듯한 명제를 끝까지 고집하는 이런 부정직함에는 변명할 만한 사정이 조금은 있다. 우리는 흔히 자기 말이 참이라고 굳게 믿고 시작한다. 그런데 상대의 논증이 그것을 반박하는 듯 보인다. 이때 당장 입장을 버렸다가 나중에야 처음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제시한 증명은 틀렸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할 참된 증명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순간에는 우리를 구해줄 논증이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겉보기에 아무리 참되고 강력하더라도 반론을 일단 공격하는 일을 규칙처럼 삼는다. 그 반론의 진실성은 표면에 불과하고, 논쟁을 계속하다 보면 그것을 무너뜨리거나 우리 주장을 확인해줄 다른 논증이 떠오를 것이라고 믿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의 부정직해질 수밖에 없고, 적어도 아주 강한 유혹을 받는다.

지성의 약함과 의지의 비뚤어짐은 이렇게 서로를 돕는다. 논쟁하는 사람은 대체로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명제를 위해 싸운다. 자기 집과 제단을 지키는 전쟁이라도 치르듯 온갖 수단을 쓴다. 앞에서 보았듯 그가 달리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지금 자기 말이 거짓이거나 의심스럽다고 여겨도, 한 번 내뱉은 말은 대개 끝까지 유지하려 든다.[^1]

[^1]: 마키아벨리는 이웃이 약해진 순간을 놓치지 말고 공격하라고 군주에게 권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웃도 똑같이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명예와 신의가 지배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성품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혼자만 지켜서는 나쁜 대가를 치른다는 논리다. 논쟁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옳아 보이는 즉시 내가 인정한다 해도 상황이 뒤집혔을 때 상대도 그렇게 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상대의 그릇된 행동 때문에 나 역시 그릇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유혹이 생긴다. 자기 주장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리에 양보하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충분히 숙고한 입장마저 순간적인 인상 때문에 버린다면 오히려 진리를 포기하고 오류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꾀와 악의로 이런 공격에 맞설 준비를 한다. 날마다 겪으며 배우고, 마침내 타고난 논리 감각을 갖듯 타고난 변증 감각도 갖게 된다. 그러나 타고난 변증 감각은 논리 감각만큼 믿을 만하지 않다. 논리 법칙을 완전히 거슬러 생각하거나 추론하기는 쉽지 않다. 잘못된 판단은 흔하지만 잘못된 형식의 추론은 드물다. 타고난 논리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드물지만, 타고난 변증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아주 많다. 이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게 주어진 재능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이성보다는 사람마다 정도가 다른 판단력에 가깝다.

실제로 옳은 사람이 피상적인 논증 때문에 당황하거나 반박당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논쟁에서 이긴 사람도 올바른 판단으로 명제를 세운 덕분이라기보다 그것을 방어한 꾀와 솜씨 덕분에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지적 검술을 학문으로 만들 수 있는가

다른 모든 능력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재능은 타고난다. 그래도 연습하고, 상대를 꺾는 전술이나 상대가 우리를 꺾으려고 쓰는 전술을 검토하면 이 기술을 상당히 익힐 수 있다. 논리학은 실생활에서 큰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변증술은 분명 쓸모가 있다. 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논리학, 곧 분석론을 변증술의 토대이자 준비 단계로 세웠고, 변증술을 주된 과업으로 삼았다. 논리학은 명제의 형식을, 변증술은 명제의 내용과 재료, 한마디로 그 실질을 다룬다. 그러니 개별적인 내용을 다루기 전에 모든 명제의 일반 형식을 먼저 살피는 것이 마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술의 목적을 내가 여기서 내린 것만큼 정확히 정의하지 않는다. 논쟁이 주된 목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진리의 발견을 목적으로 꼽는다.[^2] 또 철학은 명제를 진실성에 따라 다루지만, 변증술은 명제의 그럴듯함, 곧 다른 사람의 찬성과 동의를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에 따라 다룬다고 말한다.[^3]

[^2]: 아리스토텔레스, 《토피카》 제1권 2장.

[^3]: 같은 책 12장.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제의 객관적 진리와, 그 명제를 힘 있게 밀어붙여 동의를 얻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측면을 충분히 날카롭게 갈라 후자만 변증술의 몫으로 남겨두지는 않았다. 그가 변증술의 규칙으로 내놓은 것 가운데에는 본래 논리학에 속하는 것도 있다. 내게는 그가 문제를 명확히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4]

[^4]: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피스트적 논박》에서 변증술과 궤변술, 쟁론술을 갈라놓는 데 지나치게 공을 들였다. 그의 구분에 따르면 변증적 결론은 형식과 내용이 참이고, 궤변적·쟁론적 결론은 거짓이다. 쟁론가는 단순한 승리를 노리고 궤변가는 명성과 금전적 보상을 노린다는 차이도 둔다. 그러나 명제 내용의 진실성은 이 구분의 토대로 삼기에는 너무 불확실하다. 논쟁 당사자가 가장 확신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그것이고, 논쟁의 결과조차 이를 확실히 밝혀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변증술에는 궤변술·쟁론술·시험술까지 포함해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처음부터 옳은 것이지만, 인간의 현재 성향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 지성의 약함을 생각하면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다. 객관적 진리에 이를 때는 불필요한 다른 수단이 요구되며, 그 수단은 객관적으로 틀렸을 때도 쓸 수 있다. 실제로 누가 틀렸는지는 좀처럼 완전히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논리학과 변증술을 더 선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형식에 관한 객관적 진리는 논리학에 맡기고, 변증술은 자기 주장을 관철하는 기술로 한정해야 한다. 궤변술과 쟁론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대로 변증술에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의 구분은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진리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토론 전에 확실히 알 수 없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데모크리토스의 말처럼 진리는 깊은 곳에 있다. 두 사람이 격렬하게 논쟁한 뒤 집으로 돌아갈 때 서로의 견해를 자기 견해로 바꾸어 들고 가는 일도 있다. 모든 논쟁은 진리를 진전시키는 일만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논쟁 전에는 누구도 진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며, 상대와 자신의 논증 모두에 현혹될 수 있다.

각 학문의 대상을 다른 학문의 대상과 분명히 나누어야 한다. 변증술의 영역을 뚜렷하게 파악하려면 논리학의 관심사인 객관적 진리는 잠시 제쳐놓아야 한다. 변증술을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기술’로만 보아야 한다. 물론 실제로 옳다면 그 일은 훨씬 쉽다.

변증술 자체가 할 일은 온갖 공격, 특히 부정직한 공격에 맞서 방어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모순에 빠지거나 패배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주장을 공격하는 법도 보여준다.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일과 명제가 받아들여지게 만드는 기술은 분리해야 한다. 객관적 진리는 전혀 다른 문제다. 건전한 판단, 숙고, 경험의 몫이며, 이를 위한 특별한 기예는 없다.

이것이 변증술의 목적이다. 변증술을 ‘외양의 논리학’이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적절하지 않다. 그런 정의를 따르면 거짓 명제를 물리치는 데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옳은 사람도 자기 입장을 방어하고 유지하려면 변증술이 필요하다. 부정직한 속임수를 알아야 그것을 막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꺾으려면 때로는 자기도 그 무기를 써야 한다.

따라서 변증적 대결에서는 객관적 진리를 제쳐놓거나 우연한 사정으로 취급하고, 오직 자기 입장을 방어하고 상대의 입장을 반박하는 일만 보아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한 규칙을 따질 때 객관적 진리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대개 우리는 진리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사람은 자기가 옳은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옳다고 믿지만 틀릴 수 있고, 양쪽 모두 자기가 옳다고 믿을 수 있다. 진리는 깊은 곳에 있다. 대결이 시작될 때 사람은 대개 정의가 자기 편이라고 믿는다. 진행되는 동안 둘 다 의심하게 되고, 진리는 끝에 가서야 결정되거나 확인된다.

변증술은 진리와 무관해도 된다. 결투가 벌어졌을 때 검술 교사가 누가 옳은지를 따지지 않는 것과 같다. 찌르고 막는 것이 전부다. 변증술은 지적 검술이다. 그렇게 볼 때만 하나의 학문으로 세울 수 있다.

오직 객관적 진리만 목표로 삼는다면 변증술은 논리학으로 줄어든다. 거짓 명제를 지키는 것만 목표로 삼으면 궤변술이 된다. 어느 쪽이든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이미 안다고 가정해야 하는데, 사전에 진리를 명확히 아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므로 변증술의 참된 개념은 우리가 세운 바로 이것이다.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쓰는 지적 검술. ‘쟁론술’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기는 하지만 ‘논쟁적 변증술’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뜻의 변증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논쟁 중 진실이 자기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이기려 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술을 질서 있게 모으고, 체계로 세워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니 변증술이라는 학문에서 객관적 진리나 진리의 진전을 고려하는 것은 오히려 부적절하다. 인간에게 타고난 원초적 변증술은 오직 승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술이라는 학문은 무엇보다 부정직한 술책을 표로 만들고 분석해야 한다. 실제 토론에서 그런 술책을 즉시 알아보고 물리치기 위해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변증술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승리를 목표이자 목적으로 삼는다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내가 여러 곳을 찾아보았지만 이런 방향으로 이루어진 작업은 알지 못한다.[^5] 아직 갈지 않은 땅이다. 목적을 이루려면 경험에서 재료를 가져와야 한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 자주 벌어지는 논쟁을 관찰하며 어느 쪽이 어떤 술책을 쓰는지 살펴야 한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속임수에서 공통 요소를 찾아내면, 일정한 일반 술책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쓸 때뿐 아니라 남이 쓸 때 좌절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5]: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테오프라스토스의 수사학 저술 가운데 쟁론적 논증의 이론을 다룬 책이 있었다고 전한다. 모두 소실되었지만, 그 책이야말로 우리가 찾는 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그 일을 향한 첫 시도로 보아야 한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회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누군가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다. 입장을 바꾸는 일이 체면 손상으로 계산되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정보는 업데이트되지 않고 방어된다.

예방 장치는 의지보다 구조에 두는 편이 낫다. 제안서에 ‘이 판단을 바꿀 증거’를 미리 적고, 회의록에는 발언자가 아니라 가설의 변경 이력을 남겨라. 반박에 성공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결론으로 이동한 사람을 높이 평가하라. 그러면 생각을 바꾸는 일이 패배가 아니라 일의 일부가 된다.

뒤에서 소개할 38가지 기술은 사용법이면서 탐지표다. 스타트업북스 판본은 후자에 무게를 둔다. 상대가 궤변을 쓴다고 똑같이 갚으면 잠깐 이길 수는 있어도 팀의 정보 환경은 더 나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