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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9 · 02

1부 논리학과 논쟁술

고대인들은 논리학과 변증술을 같은 뜻으로 썼다. 하지만 그리스어 로기제스타이가 ‘곰곰이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산하다’를 뜻하고, 디알레게스타이가 ‘대화하다’를 뜻한다는 점을 보면 둘은 매우 다른 일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변증술’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와 《소피스트》, 《국가》 제7권을 비롯한 여러 저술에서 변증술을 이성을 질서 있게 사용하고 능숙하게 다루는 일이라는 뜻으로 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같은 뜻으로 이 말을 썼다. 로렌초 발라의 설명이 맞는다면, ‘논리학’이라는 말을 비슷한 뜻으로 처음 쓴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였다.[^1] 그렇다면 변증술이 논리학보다 오래된 말인 듯하다.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 역시 두 말을 대체로 같은 뜻으로 썼다.[^2]

[^1]: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운 논점’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어 표현들을 썼다.

[^2]: 키케로는 변증술을 참과 거짓을 가리는 학문이라 했고, 퀸틸리아누스는 이를 ‘논박의 기술’에 해당하는 라틴어로 옮겼다. 이 주석의 인용은 1569년에 출간된 《페트루스 라무스의 변증술》에 따른다.

이 용법, 곧 두 말을 동의어로 쓰는 관습은 중세를 지나 근대까지, 사실상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 특히 칸트 이후에는 변증술을 ‘궤변으로 논쟁하는 기술’이라는 나쁜 뜻으로 쓰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둘 가운데 더 결백해 보이는 ‘논리학’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두 말은 본래 같은 것을 가리켰고,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동의어로 인정받고 있다.

오래전부터 두 말이 이처럼 뒤섞여 쓰였고, 이제 와서 내가 마음대로 뜻을 갈라놓을 수도 없다는 점이 아쉽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논리학’을 ‘사유의 법칙, 다시 말해 이성이 작동하는 방법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로고스에는 ‘말’과 ‘이성’이라는 떼어놓을 수 없는 두 뜻이 들어 있다. 한편 ‘변증술’은 디알레게스타이, 곧 ‘대화하다’에서 왔다. 모든 대화는 사실이나 의견을 전달하므로 역사적이거나 숙의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변증술은 현대적인 의미의 ‘논쟁 기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생각의 법칙과 사람 사이의 마찰

논리학은 경험과 떼어 정의할 수 있는 순수한 선험적 대상을 다룬다. 사유의 법칙, 이성 또는 로고스가 움직이는 절차가 그 대상이다. 합리적인 존재가 혼자 생각하며 아무것에도 현혹되지 않을 때, 이성은 그런 법칙을 따른다.

반면 변증술은 두 이성적 존재 사이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둘은 이성적이므로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시각을 가리키던 두 시계가 어긋나듯 서로 의견이 달라지는 순간, 논쟁이라는 지적 대결이 시작된다. 두 사람을 오직 이성적 존재로만 본다면 반드시 합의에 이를 것이다. 차이는 각자의 개성에서 생겨난다. 다시 말해 경험에서 온다.

그러므로 사유의 학문, 순수 이성의 작동을 다루는 학문인 논리학은 선험적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한다. 반면 변증술은 대부분 경험을 토대로 세울 수밖에 없다. 두 이성적 존재가 만날 때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고, 그 차이가 순수한 사유를 어떻게 방해하는지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논쟁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생각만이 순수하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려고 어떤 수단을 쓰는지도 경험으로 배워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A와 B가 어떤 문제를 두고 함께 생각하며 의견을 나눈다고 하자.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제에서 B의 생각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린 A는 먼저 자기 사고 과정을 되짚어 잘못을 찾지 않는다. 잘못은 B에게 있다고 가정한다. 인간은 본래 고집이 세다. 이 고집이 낳는 결과를 다루는 학문을 나는 변증술이라고 부르고 싶다. 오해를 피하려면 ‘논쟁적 변증술’ 또는 ‘쟁론적 변증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쟁론은 같은 것을 조금 더 거칠게 부른 이름일 뿐이다.

논쟁적 변증술은 옳든 그르든 온갖 수단을 써서 자기 입장을 지켜내는 논쟁의 기술이다.[^3] 객관적으로 옳은 사람이 구경꾼의 눈에는, 때로는 자기 눈에조차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가령 내가 어떤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명을 내놓았는데 상대가 그 증명만 반박했다고 하자. 그 주장에는 다른 증명이 있을 수 있는데도, 상대는 마치 주장 자체를 반박한 듯 보인다. 실제로는 틀린 사람이 승자가 되고, 옳은 사람은 패자가 된다.

[^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수사학과 변증술을 한데 놓고, 진리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석론과 철학을 한데 놓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된 결론에 이르는 방법인 분석론, 일반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결론에 이르는 변증술, 형식은 맞지만 전제가 거짓인 쟁론술, 형식마저 거짓이지만 맞는 듯 보이는 궤변술을 구분했다. 뒤의 세 방법은 객관적 진리보다 승리와 진실의 외양을 노린다는 점에서 모두 논쟁적 변증술에 속한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노년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초상 사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859년. 요한 셰퍼 촬영. 이 글은 쇼펜하우어가 남긴 미완성 원고를 바탕으로 사후에 출간됐다.Johann Schäfer · 1859 · Wikimedia Commons / Frankfurt University Library · Public domain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이 책의 출발점은 꽤 현대적이다. 데이터가 같아도 회의실에 들어온 사람의 직책, 자존심, 이미 내뱉은 말 때문에 판단은 달라진다. 논리만 점검해서는 회의가 왜 망가지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쇼펜하우어의 냉소를 사실 묘사와 행동 지침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원래 진실보다 승리를 원한다’는 진단은 방어 장치를 설계하라는 경고에 가깝다. 회의 전에 결정 기준을 적고, 주장과 사람을 분리하고, 반대 증거가 나오면 입장을 바꿔도 손해 보지 않는 문화를 만드는 것. 이것이 논쟁술을 조직 운영에 적용하는 첫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