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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4 · 06

4부 보수는 가치의 척도인가

“그렇다면 이 도시가 당신에게 지불한 돈으로 당신이 도시에 얼마나 좋은 일을 했는지 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받는 것은 지금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꽤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에서 20년 동안 1천 달러밖에 벌지 못했다면 19년 9개월 전에 도시 밖으로 쫓아내는 편이 필라델피아에 더 좋았을 겁니다. 상류 지역 모퉁이의 작은 식료품점일지라도 필라델피아에서 20년을 운영하며 적어도 50만 달러를 벌지 못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말한다.

“이제 상점으로 5천 달러를 벌 수 없습니다.”

오, 친구 여러분. 주변 네 블록만 살펴보라.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 알아내 연필로 적어보라. 그것을 공급했을 때 얻을 이익을 계산하면 곧 알게 된다. 여러분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 안에 부가 있다.

누군가 말한다.

“사업은 전혀 모르시잖아요. 목사는 사업을 하나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내가 전문가라는 사실을 입증해야겠다. 하고 싶지 않지만, 전문가가 아니면 내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어쩔 수 없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별 아래 어디를 찾아도 시골 잡화점만큼 온갖 종류의 거래를 경험하게 해주는 곳은 없다.

내 경험을 자랑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면 때때로 내게 가게를 맡겼다. 아버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 여러분, 이런 일은 여러 번 일어났다.

한 남자가 가게에 들어와 물었다.

“주머니칼 있습니까?”

“아니요, 주머니칼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가버렸다. 그 남자 따위 내게 무슨 상관인가?

다른 농부가 들어왔다.

“주머니칼 있습니까?”

“아니요, 주머니칼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나는 또 가서 다른 곡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세 번째 남자가 같은 문으로 들어와 물었다.

“주머니칼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주머니칼을 찾는 겁니까? 우리가 온 동네에 주머니칼을 공급하려고 이 가게를 운영하는 줄 압니까?”

필라델피아에서도 이런 식으로 가게를 운영하는가?

그때 나는 경건한 삶의 기초와 사업 성공의 근본 원칙이 정확히 같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종교를 사업에 가져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고 광고하는 셈이다. 사업에 무능하거나, 파산으로 가는 중이거나, 도둑이다. 사업에 종교를 가져오지 않으면 몇 년 안에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아버지의 가게를 기독교적이고 경건한 방식으로 운영했다면 세 번째 손님이 왔을 때 주머니칼을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그에게 좋은 일을 하고, 나도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 보상을 받는 것은 내 의무다.

지나치게 독실한 기독교인 가운데는 무언가를 팔아 이익을 얻으면 불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반대다. 원가보다 싸게 물건을 팔면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그렇게 할 권리는 없다.

자기 돈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 돈을 맡길 수 없다. 자기 아내에게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가족 안에서 믿을 수 없다. 자기 마음과 성격과 삶에서 시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믿을 수 없다.

두 번째나 세 번째 손님에게 주머니칼을 마련해 팔고, 실제로 이익을 얻는 것이 내 의무였다. 물건의 가치보다 부정직하게 비싸게 받으면 안 되는 만큼, 이익 없이 팔아서도 안 된다.

다만 내가 물건을 팔아 얻는 만큼 산 사람도 얻게 해야 한다.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는 것이 복음의 원칙이며 일상적인 상식의 원칙이다.

오, 젊은이여, 내 말을 들어라. 살아가는 동안 삶을 누려라. 내 나이가 된 뒤에야 이 삶에서 무언가를 누리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지난 세월 내가 벌려고 한 수백만 달러를 되찾는다고 해도, 아니 그 가운데 50센트만 되찾는다고 해도, 오늘 밤 거의 성스럽게 느껴지는 이 자리만큼 큰 보람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여러 해를 지나며 내가 얻은 것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애썼고, 그 일로 오늘 밤 이미 백 배가 넘는 보상을 받았다.

이런 말을 하면 잘난 체하는 듯 들리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많으니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동료 인간을 도왔어야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누구나 그렇게 애쓰고 그 행복을 얻어야 한다.

그날 1달러를 훔치고 누군가에게 정당한 몫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품고 집에 돌아간 사람은 달게 잘 수 없다. 아침에 피곤한 채 일어나 깨끗하지 못한 양심을 안고 다음 날 일하러 간다. 수백만 달러를 쌓았더라도 성공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반면 평생 동료와 늘 나누고, 자기 권리와 이익을 만들고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의 권리와 이익을 준 사람은 하루하루를 산다. 게다가 그것은 큰 부로 가는 왕도다. 수천 명의 백만장자 역사가 그 사실을 보여준다.

필라델피아에서 가게로 아무것도 벌 수 없다고 한 저 남자는 잘못된 원칙으로 운영했다.

내일 아침 내가 당신 가게에 들어가 묻는다고 하자.

“한 블록 건너 1240번지에 사는 이웃 A를 압니까?”

“알죠. 만난 적 있습니다. 여기 모퉁이 가게에서 물건을 삽니다.”

“어디서 왔습니까?”

“모릅니다.”

“가족은 몇 명입니까?”

“모릅니다.”

“어느 당에 투표합니까?”

“모릅니다.”

“어느 교회에 다닙니까?”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왜 이런 것을 전부 묻습니까?”

필라델피아에서 가게를 운영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매사추세츠 워딩턴에 있던 아버지 가게를 운영한 방식과 똑같다.

이웃이 필라델피아로 이사 오기 전에 어디 살았는지 모르고, 관심도 없다.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 부자가 됐을 것이다. 그의 일에 마음을 쓰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볼 만큼 관심을 가졌다면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다니며 “부자가 될 기회가 없다”고 말한다. 잘못은 바로 당신 문 앞에 있다.

다른 젊은이가 저쪽에서 일어나 말한다.

“나는 장사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장사를 말하지만 모든 직업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왜 장사를 시작할 수 없는가?”

“자본이 없습니다.”

오, 칼라 너머도 내다보지 못하는 나약하고 멋만 부리는 사람이여! 길모퉁이에 서서 “자본만 넉넉하다면 얼마나 부자가 될까”라고 말하는 젊은 멋쟁이들을 보면 사람까지 나약해지는 기분이다.

“젊은이, 자본으로 부자가 될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절대로 아니다.”

어머니에게 돈이 많아 당신의 사업을 차려준다면, 당신은 자본을 계속 대게 하면서 ‘어머니에게 한 사업을 차려드릴’ 것이다.

젊은 남녀가 실무 경험으로 감당할 만큼 자라기 전에 그보다 많은 돈을 얻는 순간, 그 돈은 저주가 된다.

돈을 상속받는 것은 젊은 남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녀에게 돈을 남기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육, 기독교적이고 고귀한 성격, 넓은 친구 관계, 명예로운 이름을 남긴다면 돈보다 훨씬 낫다.

자녀가 돈을 조금이라도 물려받으면 본인에게도 나라에도 더 나쁠 것이다.

오, 젊은이여. 돈을 상속받았더라도 도움으로 여기지 마라. 평생 저주가 되어 인간 삶의 가장 좋은 것들을 빼앗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경험 없는 아들과 딸만큼 딱한 사람도 없다. 부자의 아들이 가엾다. 그는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결코 알 수 없다.

삶에서 가장 좋은 일 가운데 하나는 젊은이가 자기 생계를 직접 버는 것이다. 사랑스러운 여성과 약혼하고 자기 집을 마련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사랑과 함께 더 나은 것을 향한 신성한 영감도 찾아온다.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은행에 저축한다. 몇백 달러를 모으면 집을 찾으러 교외로 나간다. 집값 절반은 저축은행에서 빌릴 수도 있다. 이어 아내를 데려온다.

신부와 처음으로 그 문턱을 넘을 때 내 목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웅변으로 말한다.

“이 집은 내가 직접 벌어 마련했습니다. 전부 내 것이고, 이제 당신과 나눕니다.”

그 순간은 사람의 마음이 알 수 있는 가장 장엄한 순간이다.

그러나 부자의 아들은 절대 알 수 없다. 더 훌륭한 저택으로 신부를 데려갈 수는 있다. 하지만 집을 돌며 아내에게 계속 말해야 한다.

“이건 어머니가 주셨고, 저것도 어머니가 주셨고, 이것도 어머니가 주셨어.”

아내는 차라리 그의 어머니와 결혼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게 된다.

부자의 아들이 가엾다.

매사추세츠 통계를 보면 부자의 아들 열일곱 명 가운데 부자로 죽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가끔 나타나는 밴더빌트 집안의 큰아들처럼 분별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자의 아들이 딱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돈을 모두 직접 버셨습니까?”

“그렇단다. 나룻배에서 하루 25센트를 받고 일하며 시작했지.”

아들이 말했다.

“그럼 아버지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 토요일 밤 아들도 나룻배 일자리를 구하려 했다. 그곳에서는 구하지 못했지만 주급 3달러를 받는 자리를 얻었다.

부자의 아들이 그렇게 한다면 가난한 소년이 겪는 훈련을 받을 수 있다. 그 훈련은 누구에게나 대학 교육보다 더 값지다. 그러면 아버지의 수백만 달러도 돌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대개 부자는 자기를 위대하게 만든 바로 그 일을 아들에게 시키지 않는다. 아들이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어머니는 어떤가? 가엾고 나약하며 백합처럼 고운 손가락을 가진 여성적인 아들이 정직한 노동으로 생계를 벌어야 한다면 사회적인 수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부잣집 아들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만난 한 사람이 떠오른다. 사실 그보다 훨씬 가까운 곳의 한 사람도 기억난다. 여기 계신 신사 가운데 어느 큰 연회에 참석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필라델피아의 한 연회에서 마음씨 좋은 젊은이가 내 옆에 앉아 말했다.

“콘웰 씨, 지난 2~3년 동안 편찮으셨지요. 나가실 때 제 리무진을 타십시오. 브로드스트리트의 댁까지 모셔다드릴 겁니다.”

나는 무척 고맙다고 했다. 이 일화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 모르지만 사실을 따라가겠다.

리무진 밖에 있는 운전사 옆자리에 탔다. 길을 올라가며 물었다.

“이 리무진은 얼마였습니까?”

“6,800달러였습니다. 관세도 따로 냈고요.”

“차 주인이 직접 운전할 때도 있습니까?”

운전사는 너무 크게 웃다가 차를 제대로 몰지 못했다. 질문에 놀라 인도로 올라가 모퉁이 가로등을 돌아 다시 거리로 나왔다. 길로 돌아온 뒤에는 차 전체가 떨릴 만큼 웃었다.

“그분이 이 차를 운전한다고요!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릴 줄만 알아도 운이 좋은 겁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만난 부자의 아들도 이야기해야겠다.

강연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프런트에 다가가니 뉴욕 백만장자의 아들이 서 있었다. 인간의 가능성을 기묘하게 보여주는, 도저히 묘사하기 어려운 표본이었다.

머리 한쪽에는 금빛 술이 달린 작은 모자를 얹었고, 겨드랑이에는 금장식 지팡이를 끼고 있었다. 지팡이 안에 든 것이 그의 머릿속보다 많았다.

그를 묘사하기는 정말 어렵다. 앞을 볼 수 없는 외알 안경, 걸을 수 없는 에나멜 가죽 장화, 앉을 수 없는 바지를 입고 메뚜기처럼 꾸몄다.

이 인간 귀뚜라미가 내가 들어갈 때 프런트로 다가왔다. 보이지도 않는 외알 안경을 고쳐 쓰고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혀 짧은 소리를 내야 ‘잉글리시, 유 노’처럼 들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써, 종이와 봉투를 좀 주시겠어여?”

호텔 직원은 재빨리 그를 파악했다. 서랍에서 봉투와 종이를 꺼내 카운터 너머 젊은이 쪽으로 던지고 장부로 눈을 돌렸다.

봉투가 카운터를 가로질러 오자 그 젊은이가 어떻게 했는지 보았어야 한다. 수컷 칠면조처럼 몸을 부풀리고 보이지 않는 외알 안경을 바로잡으며 소리쳤다.

“이리 돌아와여. 써, 하인을 시켜 종이와 봉투를 저쪽 책상까지 가져다주세여.”

오, 가엾고 비참하고 경멸스러운 미국 원숭이여! 종이와 봉투를 20피트도 나르지 못했다. 아마 팔을 내릴 수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인간 본성을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만든 사람에게는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젊은이여, 자본이 없다면 나는 기쁘다. 필요한 것은 동전이 아니라 상식이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네 블록 안에서 사람들이 반복해 찾는 물건을 기록하라는 조언은 훌륭하다. “주머니칼 있습니까?”가 세 번 들리면 재고를 고민하라. 고객을 안다는 것은 사생활과 정치 성향을 캐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려다 막히는지 관찰하는 일이다.

반면 콘웰은 돈이 부족한 창업을 미화하고 상속은 무조건 저주라고 단정한다. 자본은 검증되지 않은 판단을 키우면 손실을 키우지만, 실험할 시간과 실패에서 회복할 여지도 준다. 그가 부유한 젊은이를 조롱하며 여성성을 약함과 연결한 표현도 시대의 성별 편견이다. 자본의 양보다 돈과 책임을 다룰 능력이 함께 자라는지가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