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어느 젊은이가 다이아몬드를 찾았다는 신문 기사에 큰 관심을 가졌다. 지금껏 발견된 다이아몬드 가운데 아주 순수한 것이었고, 같은 지역에서 앞서 발견된 것들도 몇 개 있었다.
이름난 광물학 교수를 찾아가 그 다이아몬드가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교수는 우리 대륙의 지질 구조 지도를 꺼내 경로를 그렸다. 다이아몬드를 만들기에 알맞은 지하 석탄기 지층이 오하이오와 미시시피를 지나 서쪽으로 이어졌거나, 그보다는 버지니아를 지나 대서양 연안을 따라 동쪽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다이아몬드가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발견돼 팔렸기 때문이다. 북쪽 어느 곳에서 표류하던 시기에 그곳까지 운반된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필라델피아에서 굴착기를 내리다가 바로 이 아래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의 흔적을 찾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오, 친구 여러분!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다이아몬드 광산 위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다이아몬드는 지상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광산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도 내 생각을 설명할 뿐이다. 글자 그대로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없더라도 다이아몬드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여러분에게 있다고 힘주어 말하겠다.
최근 영국 왕비는 미국인 여성의 옷차림에 지금껏 가장 큰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한 연회에 보석을 전혀 하지 않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일로 다이아몬드의 쓰임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검소하게 보이고 싶다면 몸에 걸칠 몇 개만 필요할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팔아 돈으로 바꿀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 큰 부를 얻을 기회는 지금 여기 필라델피아에 있다. 오늘 밤 내 말을 듣는 거의 모든 남녀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나는 이 말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뜻한다.
단순히 무언가를 낭송하려고 이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다. 신이 보기에 참이라고 믿는 것을 말하러 왔다. 살아온 세월이 상식을 얻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내가 옳다는 것을 안다.
오늘 밤 강연이나 모임의 입장권을 사는 일조차 어려웠을지 모르는 이 자리에 앉은 남녀에게도 ‘몇 에이커나 되는 다이아몬드’, 큰 부를 얻을 기회가 손닿는 곳에 있다.
오늘날 필라델피아보다 더 알맞은 곳은 지상에 없었다. 자본 없는 가난한 사람이 우리 도시에서처럼 빠르고 정직하게 부자가 될 기회를 얻은 시대도 세계 역사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며, 여러분이 진실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단순히 이야기를 낭송하러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 서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말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내가 믿는 것을 말하러 왔다.
내가 오늘 밤 한 말로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더 부유해지지 않는다면 내 시간은 낭비된 것이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자가 되는 것은 의무다.
독실한 동료들이 얼마나 많이 내게 묻는지 모른다.
“기독교 목사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젊은이에게 부자가 되고 돈을 벌라고 권하는 데 시간을 쓰십니까?”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끔찍한 일 아닙니까! 돈을 벌라고 설교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돈을 버는 일이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다. 부자가 된 사람은 그 공동체에서 가장 정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오늘 밤 한 젊은이가 말한다.
“돈이 있는 사람은 아주 부정직하고 불명예스럽고 비열하고 형편없다고 평생 들었습니다.”
친구여,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돈이 없는 것이다. 믿음의 기초가 완전히 틀렸다.
논쟁할 시간이 없는 주제지만 여기서 분명하고 짧게 말하겠다. 미국 부자 100명 가운데 98명은 정직하다. 정직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정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맡긴다. 정직한 사람이므로 큰 사업을 이끌고 함께 일할 사람을 많이 구한다.
다른 젊은이가 말한다.
“부정직하게 수백만 달러를 번 사람 이야기도 가끔 듣습니다.”
그렇다. 물론 여러분도 듣고 나도 듣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실제로 아주 드물어서 신문이 뉴스로 계속 다룬다. 그러다 보면 나머지 부자도 모두 부정하게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친구여, 자동차는 당신이 마련해서 나를 필라델피아 근교로 데려가 보라. 이 거대한 도시 주변에서 정원과 꽃이 있는 아름다운 집, 예술적으로 꾸민 웅장한 집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달라.
그러면 나는 우리 도시에서 사업 수완뿐 아니라 인품도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당신에게 소개할 것이다. 당신도 그 사실을 안다.
남자는 자기 집을 소유하기 전에는 참된 남자라 할 수 없다.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 소유 덕분에 더 명예롭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진실해지며, 절약하고 조심하는 사람이 된다.
사람이 큰돈을 갖는 일은 모순이 아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탐욕을 비판한다. ‘더러운 돈’이라는 말을 너무 극단적으로 오래 반복해서, 기독교인은 우리가 돈을 갖는 일 자체를 사악하게 여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헌금 바구니가 돌면 더 많이 내지 않는다고 거의 욕을 한다. 그런 교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
돈은 힘이고, 여러분은 돈을 가지려는 합리적인 야심을 품어야 한다. 돈이 없을 때보다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으므로 그래야 한다.
돈이 성서를 인쇄하고 교회를 짓고 선교사를 보내며 설교자에게 급료를 준다. 급료를 주지 않는다면 설교자도 많이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가 내 급료를 올리는 일을 언제나 환영한다. 급료를 가장 많이 주는 교회가 돈을 가장 쉽게 모으기 때문이다. 평생 예외를 본 적이 없다.
가장 많은 급료를 받는 사람은 주어진 힘으로 가장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물론 그 힘을 받은 목적에 맞게 쓸 올바른 정신이 있다면 그렇다.
그러므로 다시 말한다. 여러분은 돈을 가져야 한다. 필라델피아에서 정직하게 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신에게 다하는 의무다.
경건하려면 지독하게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실한 사람들이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누군가는 묻는다.
“가난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오랜 세월 강연을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을 품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연민을 받아야 할 가난한 사람의 수는 매우 적다.
신이 죄를 벌하려고 가난하게 만든 사람을 가엾게 여겨 돕는다면, 신이 이어가려는 정당한 벌을 막는 일이므로 틀림없이 잘못이다. 우리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보다 그런 사람을 더 많이 돕는다.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신의 가난한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모든 가난한 사람은 자기 결함이나 다른 누군가의 결함 때문에 가난해졌음을 기억하자. 가난한 상태는 어쨌든 전부 잘못이다.
이 논쟁은 인정하고 한쪽에 놓자.
뒤에 앉은 어느 신사가 일어나 묻는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더 좋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돈을 말하고 있다. 돈보다 높은 것이 당연히 있다.
무덤이 나만 홀로 서게 했으므로, 이 세상에 돈보다 높고 감미롭고 순수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금보다 높고 위대한 것이 있음을 잘 안다.
사랑은 신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래도 돈이 넉넉한 연인은 운이 좋다.
돈은 힘이고 작용하는 힘이다. 선도 악도 행한다. 선한 남녀의 손에서는 좋은 일을 이룰 수 있고 실제로 이루었다.
이 말을 빠뜨리고 싶지 않다. 우리 도시의 한 기도 모임에서 어떤 남자가 일어나 자기가 ‘신의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며 주님께 감사하는 말을 들었다.
글쎄, 그의 아내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그 집에 들어오는 모든 돈은 아내가 벌고, 남편은 베란다에서 그중 일부를 담배로 피워 없앤다.
그런 ‘신의 가난한 사람’은 더 보고 싶지 않다. 신도 보고 싶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도 경건하려면 지독하게 가난하고 지독하게 더러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에게 연민을 품되 그런 교리를 가르치지 말자.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기독교인, 유대인의 표현으로는 경건한 사람이 부를 얻도록 권하는 일에 편견이 있다.
그 편견은 아주 널리 퍼졌고 사건도 충분히 오래전 일이니 이제 안전하게 말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템플대학교 신학교에 자기가 학과에서 유일하게 경건한 학생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내 사무실로 들어와 책상 곁에 앉았다.
“총장님, 제가 와서 총장님을 바로잡는 것이 제 의무인 듯합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아카데미의 피어스학교 졸업식에서 젊은이가 부를 원해도 명예로운 야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를 향한 야심이 절제하게 만들고, 좋은 이름을 얻고 싶게 하며, 부지런하게 일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얻으려는 야심이 좋은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총장님, 성서에는 ‘돈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적혀 있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성서에서 그런 문장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예배당에 가서 성서를 가져와 그 자리를 보여달라고 했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서를 펼쳐 들고 성큼성큼 사무실로 들어왔다. 편협한 종파주의자나 성서를 잘못 해석해 자기 신앙의 기초로 삼은 사람 특유의 독선적인 자부심을 가득 품은 모습이었다.
그는 내 책상 위에 성서를 내던지고 거의 비명을 지르듯 귀에 외쳤다.
“여기 있습니다, 총장님. 직접 읽어보십시오.”
내가 말했다.
“젊은이,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다른 교파 사람에게 성서를 대신 읽어달라고 믿고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걸세. 자네는 다른 교파에 속했지. 그래도 신학교에서 강조점이 해석이라고 배웠을 테니, 성서를 직접 들고 올바른 곳에 힘을 주어 읽어보겠나?”
그는 성서를 들고 자랑스럽게 읽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악의 뿌리다.’”
이제 제대로 읽었다. 그 오래된 책을 정확히 인용하면 절대적인 진실을 인용하는 것이다.
나는 그 책이 지금껏 치른 가장 거대한 싸움의 50년을 살아왔다. 이제 그 깃발이 자유롭게 휘날리는 모습을 본다. 지상의 위대한 지성들이 성서는 참이며 모두 참이라는 데 지금 이 순간만큼 널리 동의한 때는 세계 역사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정확하게 인용했을 때 절대적인 진실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악의 뿌리다.”
너무 빨리 또는 부정직하게 돈을 얻으려는 사람은 틀림없이 수많은 덫에 빠진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돈을 우상으로 만드는 일이다. 성서와 인간의 상식은 어디서나 순수하고 단순한 우상숭배를 비난한다.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생각하는 대신 달러를 숭배하는 사람, 돈 자체를 우상으로 받드는 사람, 돈을 지하실에 쌓아두거나 양말 속에 숨기는 구두쇠, 세상에 좋은 일을 하도록 투자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독수리 문양이 비명을 지를 때까지 달러를 꽉 껴안는 사람 안에 모든 악의 뿌리가 있다.
이제 이 이야기는 놓고 거의 모든 분이 묻는 질문에 답하겠다.
“필라델피아에서 부자가 될 기회가 있습니까?”
그 기회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보는 순간 당신 것이 된다.
뒤에 앉은 나이 든 신사가 일어난다.
“콘웰 씨, 필라델피아에서 31년을 살고도 이 도시에서 돈을 벌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끝났습니다. 내가 해봤습니다.”
“어떤 사업을 하셨습니까?”
“여기서 20년 동안 상점을 운영했지만, 20년을 다 합쳐도 1천 달러 이상 벌지 못했습니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돈은 선택지를 늘리고 선한 일에도 쓰인다. 가난을 낭만화하지 말라는 콘웰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부자 100명 중 98명은 정직해서 부자가 됐다’, ‘가난은 모두 누군가의 결함 탓’이라는 말에는 근거가 없다. 상속과 독점, 차별과 질병, 불황과 운은 그의 도식 밖에 있다. 주택 소유가 인격을 완성한다는 주장도 자산을 도덕성으로 바꿔 읽은 오류다.
사업에서 매출은 고객이 어떤 가치를 인정했다는 중요한 신호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 전체의 점수표는 아니다. 가격을 매기기 어려운 돌봄과 공공재가 있고, 해를 끼치면서도 큰돈을 버는 사업도 있다. 돈을 선이나 악으로 미리 판정하지 말되, 돈의 크기로 사람의 선함까지 재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