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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8 · 11

10부 새로운 개인주의

미래는 예술가들의 모습과 같다.

물론 여기서 내놓은 구상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고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완전히 옳다. 실용적이지 않고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바로 그래서 실행할 가치가 있고,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다.

실용적인 구상이란 무엇인가? 이미 존재하거나, 현재의 조건에서 실행할 수 있는 구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바로 그 현재의 조건이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구상은 모두 잘못되고 어리석다.

현재의 조건은 사라질 것이고 인간 본성은 바뀔 것이다. 인간 본성에 관해 우리가 확실히 아는 유일한 사실은 그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변화는 인간 본성에 관해 단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속성이다.

실패하는 제도는 인간 본성의 성장과 발달이 아니라 불변성에 기대는 제도다. 루이 14세의 오류는 인간 본성이 언제까지나 같을 것이라 생각한 데 있었다. 그 오류의 결과가 프랑스혁명이었다. 훌륭한 결과였다. 정부의 실수가 낳은 결과는 모두 아주 훌륭하다.

개인주의는 의무라는 병약한 상투어를 들고 인간을 찾아오지 않는다. 의무란 남들이 원한다는 이유로 남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기희생이라는 끔찍한 상투어도 들고 오지 않는다. 자기희생은 야만적인 신체 훼손의 잔재일 뿐이다.

사실 개인주의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 안에서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모든 발달이 향하는 지점이며, 모든 유기체가 자라며 획득하는 분화다. 모든 생명 형태에 내재하고, 모든 생명이 서둘러 향하는 완성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인간에게 강제를 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강제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을 선하게 만들려고 억지로 몰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선하다는 사실을 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개인주의를 발전시킬 것이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개인주의가 실용적인지 묻는 것은 진화가 실용적인지 묻는 것과 같다. 진화는 생명의 법칙이며, 개인주의를 향하지 않는 진화는 없다. 그 경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성장이 인위적으로 멈췄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죽은 경우다.

개인주의는 또한 이기적이지 않고 꾸밈도 없을 것이다. 권위의 터무니없는 폭정이 낳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말이 본래의 단순한 뜻에서 완전히 뒤틀려, 정반대 의미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예술에서 사실인 것은 삶에서도 사실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옷을 입는 사람을 꾸민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중이다. 이런 문제에서 꾸밈이란 이웃의 견해에 따라 옷을 입는 것이다. 그 견해는 다수의 견해이므로 아마 대단히 어리석을 것이다.

또 자기 개성을 온전히 실현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사는 사람, 곧 자기 계발을 삶의 첫째 목표로 삼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기심이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타심은 남의 삶을 내버려 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심은 언제나 주위에 완전히 획일적인 인간형을 만들려 한다. 이타심은 무한히 다양한 인간형을 즐거운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다양성을 기뻐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은 이기적이지 않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웃에게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같은 의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일이야말로 몹시 이기적이다.

이웃이 왜 그래야 하는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종류의 생각이든 요구하는 것은 괴물 같은 일이다.

붉은 장미는 붉은 장미가 되고 싶어 한다고 이기적이지 않다. 정원의 다른 꽃도 모두 붉은 장미가 되기를 바란다면 끔찍하게 이기적인 장미가 될 것이다.

개인주의 아래에서 사람들은 완전히 자연스럽고 철저히 이타적일 것이다. 말의 뜻을 알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삶에서 그 뜻을 실현할 것이다.

지금처럼 자기중심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타인에게 요구하는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런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 개인주의를 실현하면 공감도 깨닫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실천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공감을 거의 기르지 못했다. 고통에만 공감해 왔는데, 고통에 대한 공감은 가장 높은 형태가 아니다.

모든 공감은 훌륭하지만 고통에 대한 공감은 그 가운데 가장 덜 훌륭하다. 자기중심성이 묻어 있고 병적으로 변하기 쉽다. 자기 안전을 걱정하는 공포가 어느 정도 들어 있다. 우리도 나병 환자나 시각 장애인처럼 되고 아무도 돌보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 공감은 이상하게도 시야를 좁힌다. 삶의 상처와 질병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공감해야 한다.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 활력과 건강과 자유에 공감해야 한다.

넓은 공감은 물론 더 어렵다. 더 큰 이타심을 요구한다. 누구나 친구의 고통에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친구의 성공에 공감하려면 대단히 훌륭한 본성, 사실 진정한 개인주의자의 본성이 필요하다.

경쟁과 자리다툼의 압력이 큰 현대 사회에서 그런 공감은 자연히 드물다. 어디에나 퍼져 있고 영국에서 아마 가장 끔찍한, 획일성과 규칙 순응이라는 부도덕한 이상이 그것을 더욱 억누른다.

고통에 대한 공감은 물론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 가운데 하나다. 개별성을 지닌 동물, 곧 고등동물도 우리와 함께 느낀다.

그러나 기쁨에 대한 공감은 세상의 기쁨 총량을 늘리는 반면, 고통에 대한 공감은 고통의 양을 실제로 줄이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악을 더 잘 견디게 할 수는 있지만 악 자체는 남는다.

결핵에 공감한다고 결핵이 낫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 할 일이다. 사회주의가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 과학이 질병 문제를 해결하면 감상주의자가 활동할 영역은 줄고, 인간의 공감은 넓고 건강하고 자발적이 될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즐거운 삶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미래의 개인주의는 기쁨을 통해 발전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회를 재건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인간에게 전한 개인주의는 고통을 통해서나 고독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이상은 사회를 완전히 떠나는 사람, 또는 사회에 철저히 저항하는 사람의 이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사회적이다. 테바이드 사막에도 결국 사람이 모였다.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자가 개성을 실현한다 해도, 그가 실현하는 개성은 빈약한 경우가 많다.

한편 고통이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끔찍한 진실은 세계에 대단한 매혹을 행사한다. 설교단과 연단 위의 얕은 연설가와 사상가는 세상이 쾌락을 숭배한다며 자주 비난하고 칭얼거린다. 그러나 세계 역사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이 이상이었던 때는 드물다. 고통 숭배가 훨씬 자주 세계를 지배했다.

성인과 순교자, 자기를 고문하는 사랑,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거친 열정, 칼로 베고 회초리로 때리는 중세야말로 진정한 기독교다. 중세의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다.

르네상스가 밝아 오고 삶의 아름다움과 살아가는 기쁨이라는 새로운 이상을 가져오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술에서도 드러난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그리스도를 궁전이나 정원에서 다른 소년과 노는 아이로 그렸다. 어머니 품에 누워 어머니나 꽃이나 밝은 새를 보며 웃는 모습으로, 위엄 있고 당당하게 세계를 누비는 인물로, 죽음에서 삶으로 황홀하게 솟아오르는 경이로운 인물로 그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그릴 때조차 악인이 고통을 가한 아름다운 신으로 그렸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 크게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그들이 즐거워한 일은 존경하는 남녀를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의 사랑스러움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사실 너무 많이 그렸다. 유형과 소재의 단조로움은 지겹고 예술에도 해로웠다. 예술에 대한 대중 권위가 낳은 결과이므로 유감스럽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그 소재에 들어 있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교황의 초상을 그릴 때 위대한 예술가였다. 성모와 아기 그리스도를 그릴 때는 전혀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이상과 충돌하는 이상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이로웠던 르네상스에 전할 메시지가 없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표현을 찾으려면 중세 예술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그는 상처 입고 망가진 자다. 아름다움은 기쁨이므로 보기에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옷도 기쁨이 될 수 있으므로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 놀라운 영혼을 지닌 거지이며, 영혼이 성스러운 나병 환자다. 재산도 건강도 필요하지 않다. 고통을 통해 완성을 실현하는 신이다.

인간의 진화는 느리고 인간의 부정의는 크다. 고통을 자기실현의 한 방식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세계의 몇몇 지역에는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현대 러시아에 사는 사람은 고통 말고는 자기 완성을 실현할 방법이 없다. 몇몇 러시아 예술가는 예술 안에서 자기를 실현했다. 지배적인 음조가 고통을 통한 인간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중세적인 소설 속에서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예술가가 아니며 실제 현실 말고는 삶의 방식이 없는 사람에게 고통은 완성으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현재의 러시아 정부 아래에서 행복하게 사는 러시아인은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고 믿거나, 영혼이 있어도 발전시킬 가치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권위가 악임을 알기에 거부하고, 고통을 통해 개성을 실현하기에 모든 고통을 환영하는 허무주의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그에게 그리스도교의 이상은 참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권위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황제 권위를 받아들이고 세금을 냈다. 유대교회의 종교 권위를 견뎠고, 그 폭력에 자기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 사회 재건의 구상도 없었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는 구상이 있다. 빈곤과 거기서 나오는 고통을 없애려 한다. 아픔과 아픔에서 생기는 고통도 없애고 싶어 한다. 그 방법으로 사회주의와 과학을 믿는다.

목표는 기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개인주의다. 이 개인주의는 지금까지의 어떤 개인주의보다 넓고 충만하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고통은 완성으로 가는 궁극적 방식이 아니다. 임시적인 수단이며 항의일 뿐이다. 잘못되고 불건전하고 부당한 환경과 관련돼 있다. 잘못과 질병과 부정의가 제거되면 고통은 더는 설 자리가 없다.

자기 일을 다한 것이다. 위대한 일이었지만 거의 끝나 간다. 그 영역은 날마다 줄어든다.

인간은 고통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찾아온 것은 고통도 쾌락도 아니라 오직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강렬하고 충만하고 완전하게 살고 싶어 했다.

다른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자신도 억압당하지 않으며, 모든 활동이 즐거울 수 있게 되면 인간은 더 온전하고 건강하고 문명화되며 더 자기다워질 것이다.

즐거움은 자연의 시험이며 승인 표시다. 인간이 행복할 때 그는 자기 자신과 환경에 조화를 이룬다.

사회주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실현을 위해 일하고 있는 새로운 개인주의는 완전한 조화가 될 것이다.

그리스인이 추구했지만 사유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했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먹여 살린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추구했지만 예술에서만 온전히 실현했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굶긴 노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완전할 것이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 완성에 이를 것이다.

새로운 개인주의는 새로운 헬레니즘이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성공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구조

와일드는 이기심을 자기 방식으로 사는 일이 아니라 남에게 내 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일로 다시 정의한다. 이 관점에서 자율성은 혼자 일하는 특권이 아니다. 서로 다른 속도와 야망, 생애 조건을 강제로 하나로 맞추지 않는 상호 규칙이다.

그가 가장 높은 공감으로 꼽은 것은 친구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능력이다. 한정된 승진 자리, 개인별 강제 순위, 정보 독점이 지위를 결정하는 조직에서는 동료의 성취가 곧 내 손실이 된다. 협업을 외치면서 경쟁을 설계하면 질투는 인격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정상 반응이 된다.

팀 성과의 기여를 기록하고 지식 공유를 보상하며, 성장 경로를 관리직 하나로 좁히지 않는 장치가 필요하다. 동시에 즐거움을 무조건 옳음의 증거로 볼 수는 없다. 즐거운 일이 타인에게 비용을 떠넘길 수도 있다. 자율성, 영향, 동의라는 세 기준을 함께 놓을 때 와일드의 ‘기쁨을 통한 개인주의’는 쾌락주의가 아니라 각자가 잘 살 수 있는 조직 원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