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물론 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악취 나는 굴 같은 집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살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혐오스러운 환경에서 굶주려 병든 아이를 기르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사회의 안전이 지금처럼 날씨에 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서리가 내렸다고 십만 명이 일자리를 잃어 비참한 모습으로 거리를 헤매거나, 이웃에게 구걸하거나, 빵 한 조각과 불결한 잠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끔찍한 보호소 문 앞에 몰려들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동의 번영과 행복을 나눌 것이다. 서리가 내려도 사실상 손해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주의가 가치 있는 까닭은 오직 개인주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엇이라 부르든, 사유재산을 공공의 부로 바꾸고 경쟁을 협력으로 대체한다면 사회는 건강한 유기체라는 제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물질적 안녕을 누리도록 보장할 것이다. 삶에 알맞은 토대와 환경을 마련해 주는 셈이다.
그러나 삶이 가장 높은 완성에 이르려면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개인주의다.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이라면, 정부가 현재의 정치 권력에 더해 경제 권력까지 무장한다면, 한마디로 산업 독재가 들어선다면 인간의 마지막 처지는 처음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지금은 사유재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당수 사람이 제한적이나마 개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일할 필요가 없거나, 자기 성향에 맞고 즐거움을 주는 활동 영역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 교양인들이 그들이다. 한마디로 자기를 실현한 진정한 인간이며, 그들을 통해 인류 전체가 부분적으로나마 자신을 실현한다.
반면 자기 재산이 없고 늘 굶어 죽을 문턱에 선 사람들은 짐승 같은 노동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자기 성향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을, 결핍이라는 단호하고 비합리적이며 모욕적인 폭정 때문에 떠맡는다.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우아한 몸가짐도, 매력 있는 말도, 문명도, 교양도, 세련된 즐거움도, 삶의 기쁨도 없다. 인류는 그들의 집단적 힘에서 커다란 물질적 번영을 얻는다. 그러나 얻는 것은 물질적 결과뿐이다. 가난한 사람 한 명은 그 자체로 아무런 중요성도 얻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고 짓밟는 힘을 이루는 극미한 입자일 뿐이다. 그 힘은 오히려 그가 짓눌린 상태를 선호한다. 그래야 훨씬 잘 복종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유재산 아래에서 생겨난 개인주의가 언제나 훌륭하고 놀랍지는 않으며, 대체로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교양과 매력은 없더라도 많은 미덕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두 말 모두 옳다.
사유재산의 소유는 사람을 몹시 타락시키곤 한다. 사회주의가 그 제도를 없애려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사실 재산은 성가신 물건이다. 몇 해 전 사람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재산에는 의무가 따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너무 자주, 너무 지루하게 반복한 나머지 마침내 교회도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설교단에서나 들을 수 있다.
그 말은 완전히 옳다. 재산에는 의무가 있을 뿐 아니라 의무가 너무 많아서, 어느 정도를 넘으면 소유 자체가 고역이 된다. 끝없는 요구와 업무와 걱정이 따라온다. 재산이 즐거움만 준다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무 때문에 견딜 수 없다. 부자들을 위해서라도 재산을 없애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미덕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런 미덕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럽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선에 감사한다고들 한다. 물론 일부는 감사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결코 감사하지 않는다. 배은망덕하고, 불만을 품고, 불복종하며, 반항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그들이 보기에 자선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일부 배상, 또는 감상적인 시혜다. 대개는 감상주의자가 그들의 사생활을 지배하려는 무례한 시도까지 딸려 온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에 왜 감사해야 하는가? 그들도 식탁에 앉아야 하며, 이제 그 사실을 알아 가고 있다.
불만에 관해 말하자면, 그런 환경과 비천한 생활에 불만을 품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짐승 같은 존재일 것이다. 역사를 읽은 사람에게 불복종은 인간의 원초적 미덕이다. 진보는 불복종과 반란을 통해 이루어졌다.
가난한 사람이 절약한다고 칭찬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에게 절약을 권하는 것은 기괴하고 모욕적이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덜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도시든 농촌이든 노동자가 절약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부도덕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영양실조에 걸린 동물처럼 살 수 있음을 증명할 준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살기를 거부해야 한다. 훔치거나 구빈 지원에 의지해야 한다. 물론 많은 사람은 구빈 지원도 일종의 도둑질로 여긴다. 구걸은 빼앗는 것보다 안전하지만, 구걸보다는 빼앗는 쪽이 더 당당하다.
그렇다. 감사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으며 불만에 차서 반항하는 가난한 사람은 아마도 진짜 개성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그 안에는 많은 것이 있다. 적어도 그는 건강한 항의다. 이른바 유덕한 빈민은 물론 가엾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도저히 존경할 수는 없다. 그들은 적과 사적으로 타협하고, 형편없는 죽 한 그릇에 타고난 권리를 팔았다. 대단히 어리석기도 할 것이다.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축적을 허용하는 법 아래에서 자신이 아름답고 지적인 삶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다면, 그 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법 때문에 삶이 망가지고 흉해진 사람이 어떻게 법의 존속에 순응하는지는 거의 믿을 수 없다.
그래도 설명은 어렵지 않다. 비참함과 가난은 인간의 본성을 철저히 비하하고 마비시키기 때문에, 어떤 계층도 자기 고통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 줘야 하며, 그렇게 알려 줘도 당사자는 흔히 전혀 믿지 않는다.
대자본가들이 선동가를 비난하며 하는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이다. 선동가는 쓸데없이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완전히 만족하며 사는 공동체의 어느 계층에 느닷없이 찾아가 불만의 씨앗을 뿌린다. 바로 그래서 선동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직 불완전한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없다면 문명을 향한 진전도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노예들이 행동했거나 자유를 분명히 요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보스턴 등지의 몇몇 선동가가 지극히 불법적으로 행동한 결과였다. 그들은 노예도, 노예 소유주도 아니었고 사실 그 문제와 직접 관계가 없었다. 불을 붙이고 모든 일을 시작한 사람은 분명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다.
흥미롭게도 노예들은 그들에게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고, 공감조차 거의 보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 자유를 얻었을 때, 너무도 완전한 자유를 얻어 굶을 자유까지 생기자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새로운 처지를 몹시 후회했다. 사상가에게 프랑스혁명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라는 이유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굶주린 방데의 농민이 추악한 봉건제의 대의를 위해 자진해서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이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안전망의 목적은 복종이 아니라 선택권이다
이 장의 중심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있다. “사회주의가 가치 있는 까닭은 개인주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와일드가 원하는 것은 국가나 조직이 삶을 대신 결정하는 체제가 아니다. 굶주림 때문에 아무 일이나 받아들여야 하는 강제를 줄여, 각자가 자기 일을 고를 수 있게 하는 물질적 바닥이다.
스타트업에서도 급여, 휴가, 건강 지원, 퇴직 안전망은 단지 이탈률을 낮추는 장치가 아니다. 사람이 싫다고 말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역할을 바꾸고, 떠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다. 혜택과 스톡옵션이 발언권을 묶는 수단이 되면 안전망은 황금 족쇄가 된다.
다만 와일드는 가난한 사람들을 때로 하나의 무기력한 집단처럼 묘사하고, 미국의 노예 해방에서 노예 당사자의 저항과 조직을 사실상 지워 버린다. 이는 역사적으로 부정확하고 그의 엘리트주의를 드러낸다. 오늘의 독자는 ‘대신 깨우쳐 주는 선동가’보다 문제를 겪는 사람이 스스로 말하고 조직할 자원을 어떻게 확보할지 물어야 한다. 선택권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