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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8 · 10

9부 창작할 권리

이제 이 주제의 참으로 비루한 측면은 떠나 예술에 대한 대중 통제의 문제로 돌아가자. 여기서 대중 통제란 여론이 예술가에게 어떤 형식과 사용 방식을 택하고 어떤 재료로 작업할지 지시하는 것을 뜻한다.

영국에서 가장 잘 살아남은 예술은 대중이 관심을 보이지 않은 예술이라고 앞에서 지적했다. 그러나 대중은 연극에는 관심을 보인다. 지난 10년이나 15년 동안 연극이 어느 정도 발전했으므로, 그 발전이 어디에서 왔는지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발전은 오직 몇몇 예술가 개인이 대중의 부족한 취향을 자기 기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술을 단순한 수요와 공급의 문제로 보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어빙은 놀랍도록 생생한 개성과 진정한 색채감을 지닌 양식,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상상력과 지성으로 창조하는 보기 드문 능력을 지녔다. 그가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는 데만 목적을 두었다면 가장 평범한 연극을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만들고, 한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만큼 성공하고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조건과 예술 형식 안에서 예술가로서 자기 완성을 실현하려 했다. 처음에는 소수에게 다가갔고, 이제는 다수를 교육했다. 대중 안에 취향과 기질을 만들어 냈다.

대중은 그의 예술적 성공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 성공이 전적으로 대중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기준을 실현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도 이해하는지는 자주 의문스럽다. 대중의 기준을 따랐다면 라이시엄 극장은 지금 런던의 몇몇 인기 극장처럼 이류 장터 극장이 됐을 것이다.

대중이 이해하든 아니든 사실은 남는다. 그들 안에 취향과 기질이 어느 정도 만들어졌고, 대중에게는 이런 자질을 발전시킬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대중은 더 문명화되지 않는가? 능력이 있는데 무엇이 막는가?

다시 말하지만 예술가와 작품에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이 그들을 막는다.

라이시엄과 헤이마켓 같은 극장에 올 때 대중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는 듯하다. 두 극장에는 관객에게 예술이 다가갈 수 있는 기질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예술가 개인들이 있었다. 런던의 극장마다 자기 관객이 있다.

그 기질이란 무엇인가? 받아들이려는 태도다. 그것뿐이다.

작품과 예술가에게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을 품고 다가가는 사람은 예술적 인상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정신 상태로 다가가는 것이다. 작품이 관객을 지배해야지, 관객이 작품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관객은 수용적이어야 한다. 거장이 연주할 바이올린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이래야 하고 저래서는 안 된다는 자기의 어리석은 견해, 미련한 편견, 터무니없는 생각을 더 온전히 억누를수록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할 가능성은 커진다.

교양 없는 영국의 극장 관객에게는 물론 명백한 말이다. 그러나 이른바 교육받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교육받은 사람의 예술 관념은 자연히 과거의 예술에서 나온다. 반면 새 작품은 예술이 한 번도 아니었던 모습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과거의 기준으로 측정하면, 그 작품이 진정으로 완성되기 위해 거부해야 했던 바로 그 기준으로 재는 셈이다.

상상력의 매체와 조건을 통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질만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조각과 회화에도 맞는 말이지만 연극 같은 예술에는 더욱 맞는다.

그림과 조각은 시간과 싸우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헤아리지 않으며 한순간에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문학은 다르다. 효과의 전체성을 깨달으려면 시간을 지나가야 한다.

연극 1막에서 일어난 어떤 일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는 3막이나 4막에 이를 때까지 관객에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어리석은 관객이 화를 내고 소리치며 공연을 방해하고 예술가를 성가시게 해야 하는가?

아니다. 정직한 사람은 조용히 앉아 경이와 호기심과 긴장이라는 유쾌한 감정을 알아야 한다. 저속한 성질을 터뜨리려고 공연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술적 기질을 실현하고 얻기 위해 간다.

그는 작품의 심판자가 아니다. 작품을 바라보도록 입장을 허락받은 사람이다. 작품이 훌륭하다면 바라보는 동안 자기를 망치는 자아, 곧 무지에서 나오는 자아든 지식에서 나오는 자아든 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연극에 관한 이 점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듯하다. 《맥베스》가 현대 런던 관객 앞에서 처음 공연된다면 많은 사람이 1막에 마녀들이 기괴한 문구와 우스운 말을 내뱉으며 등장하는 데 강력히 반대할 것임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면 《맥베스》 속 마녀들의 웃음이 《리어왕》 속 광기의 웃음만큼 무섭고, 오셀로의 비극에서 이아고가 웃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예술의 관객보다 연극 관객에게 완전한 수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권위를 행사하려는 순간 그는 예술과 자기 자신의 공공연한 적이 된다. 예술은 신경 쓰지 않는다. 고통받는 쪽은 그 자신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대중의 권위와 그 권위를 인정하는 일은 치명적이다.

새커리의 《에스먼드》가 아름다운 작품인 까닭은 작가가 자기 마음에 들도록 썼기 때문이다. 다른 소설인 《펜데니스》, 《필립》, 심지어 때때로 《허영의 시장》에서 그는 대중을 너무 의식한다. 대중의 감정에 직접 호소하거나 대놓고 조롱하면서 작품을 망친다.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에게 대중은 존재하지 않는다. 괴물을 재우거나 먹이는 데 쓸 양귀비나 꿀 섞은 과자도 없다. 그런 일은 인기 소설가에게 맡긴다.

오늘 영국에는 비할 데 없는 소설가 조지 메러디스가 있다. 프랑스에는 더 나은 예술가들이 있지만 삶을 그처럼 넓고 다양하며 상상력 속에서 진실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러시아에는 소설 속 고통이 무엇인지 더 생생하게 아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그러나 소설 속 철학은 그의 몫이다.

그의 인물들은 그저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생각 속에서 산다. 무수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 안과 주위에 영혼이 있다. 해석적이며 상징적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 경이로운 인물들을 만든 작가는 자기 기쁨을 위해 그들을 만들었다. 대중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도 지시하거나 영향을 주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자기 개성을 계속 더 강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작품을 생산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에게 오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다음에는 소수가 왔다. 그래도 그는 바뀌지 않았다. 이제 다수가 찾아온다. 그는 여전히 똑같다. 비할 데 없는 소설가다.

장식 예술도 다르지 않다. 대중은 내가 보기에 ‘국제적 저속함 대박람회’의 직계 전통이었던 것에 참으로 애처로운 집요함으로 매달렸다. 그 전통은 너무 끔찍해서 사람들이 사는 집은 장님에게나 알맞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름다운 물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염색공의 손에서 아름다운 색이, 예술가의 머리에서 아름다운 무늬가 나왔다. 아름다운 물건의 쓰임과 가치와 중요성이 널리 알려졌다.

대중은 참으로 분개했다. 화를 냈고 어리석은 말을 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도 조금도 해를 입지 않았다. 여론의 권위를 받아들인 사람도 없었다.

이제 현대의 어느 집에 들어가든 좋은 취향의 흔적, 아름다운 환경의 가치를 인정한 흔적,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표시를 보지 않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 사람들의 집은 대체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꽤 많이 문명화됐다.

다만 실내 장식과 가구 혁명의 놀라운 성공이 대다수 대중의 취향이 크게 발전한 결과는 아니라는 사실을 공정하게 밝혀야 한다.

주된 이유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기쁨을 깊이 알게 됐고, 대중이 전부터 원하던 물건의 추함과 저속함을 생생하게 깨달아 아예 그런 물건의 공급을 끊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방식으로 방을 꾸미려면 지금은 삼류 하숙집의 중고 가구가 나온 경매에 가서 모든 것을 구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런 물건은 더는 생산되지 않는다. 아무리 싫어해도 오늘날 사람들은 주변에 어느 정도 매력적인 것을 두고 살아야 한다. 다행히 예술 문제에서 권위를 행사하려던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이런 문제에서 모든 권위가 나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때때로 예술가가 살기에 가장 알맞은 정부 형태가 무엇인지 묻는다. 답은 하나뿐이다. 예술가에게 가장 알맞은 정부 형태는 정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예술가와 그의 예술에 대한 권위는 우스꽝스럽다.

전제정 아래에서 예술가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완전히 맞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은 폭정의 대상인 신민이 아니라 떠돌아다니는 경이의 창조자로, 매혹적인 방랑의 개성으로 전제군주를 찾아갔다. 환대를 받고 매력을 발산하며 평화롭게 창작하도록 허용받았다.

전제군주에게 유리한 점을 하나 말하자면, 그는 개인이기에 교양을 가질 수 있지만 괴물인 군중에게는 교양이 없다는 것이다. 황제나 왕은 허리를 굽혀 화가의 붓을 주워 줄 수 있다. 민주 대중이 허리를 굽힐 때는 진흙을 집어 던지려는 것뿐이다. 그래도 대중은 황제만큼 많이 굽힐 필요는 없다. 진흙을 던지고 싶을 때는 사실 아예 굽힐 필요도 없다.

그러나 군주와 군중을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모든 권위는 똑같이 나쁘다.

전제군주에는 세 종류가 있다. 몸을 지배하는 전제군주, 영혼을 지배하는 전제군주, 몸과 영혼을 함께 지배하는 전제군주다. 첫째는 군주, 둘째는 교황, 셋째는 인민이라 불린다.

군주는 교양을 갖출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군주가 그랬다. 그래도 위험하다. 베로나에서 쓰디쓴 식탁에 앉은 단테, 페라라의 광인 감방에 갇힌 타소를 생각해 보라. 예술가는 군주와 살지 않는 편이 낫다.

교황도 교양을 갖출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교황, 특히 나쁜 교황들이 그랬다. 나쁜 교황은 좋은 교황이 사상을 증오한 만큼, 아니 그와 똑같은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인류는 교황청의 악덕에 많은 빚을 졌고, 교황청의 선량함은 인류에 무서운 빚을 졌다.

바티칸이 천둥 같은 수사의 웅장함은 지키고 번개의 채찍은 잃었다 해도, 예술가는 교황과 살지 않는 편이 낫다.

추기경 회의에서 첼리니 같은 사람을 위해 보통의 법과 권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 이도 교황이었다. 그러나 첼리니를 감옥에 밀어 넣은 이도 교황이었다.

첼리니는 분노로 병들 때까지 갇혀 있었다. 실재하지 않는 환영을 만들었고, 금빛 태양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에 너무 매혹돼 탈출을 시도했다. 한 탑에서 다른 탑으로 기어가다 새벽의 아찔한 허공으로 떨어져 불구가 됐다. 포도 재배 농부가 포도 잎으로 그를 덮고 수레에 실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여 그를 돌봐 줄 사람에게 데려갔다.

교황은 위험하다.

인민과 그 권위는 어떠한가? 아마 충분히 말했을 것이다. 그 권위는 눈멀고 귀먹었으며 흉하고 기괴하다. 비극적이고 우습고 진지하고 외설적이다. 예술가는 인민과 함께 살 수 없다.

모든 전제군주는 뇌물을 준다. 인민은 뇌물을 주고 야만적으로 만든다. 누가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라고 했는가? 그들은 살고 듣고 사랑하도록 태어났다. 누군가 그들에게 대단히 잘못했다.

그들은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모방해 자신을 망쳤다. 군주의 홀을 가져갔다. 어떻게 제대로 쓰겠는가? 교황의 삼중관을 가져갔다. 어떻게 그 무게를 감당하겠는가?

그들은 마음이 부서진 광대와 같다. 영혼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제와 같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들을 가엾게 여겨라. 그들이 아름다움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게 하라. 누가 그들에게 폭정의 재주를 가르쳤는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더 많다. 르네상스가 위대했던 까닭도 말할 수 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않고 그런 것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개인이 자유롭고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성장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대하고 개성적인 예술가와 인간이 나왔다.

루이 14세가 근대 국가를 만들며 예술가의 개인주의를 파괴한 일도 말할 수 있다. 끝없는 반복으로 물건을 괴물처럼 단조롭게 만들고, 규칙에 순응시켜 경멸스럽게 만들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전통을 새롭게 아름답게 만들고 새로운 양식을 고대의 형식과 하나로 엮었던 표현의 훌륭한 자유를 모두 파괴했다.

그러나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도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다뤄야 하는 것은 미래다. 과거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됐던 모습이며, 현재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모습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취향은 조사되는 것만큼 길러지는 것이다

어빙과 장식 예술의 사례에서 와일드는 대중의 취향을 고정된 수요로 보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을 꾸준히 제공하고 낡은 선택지의 공급을 멈추면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범위 자체가 넓어진다고 본다.

제품팀도 현재 행동만 읽으면 과거 인터페이스가 훈련한 습관을 영구 수요로 오해한다. 새 방식은 즉시 전환율이 낮을 수 있다. 그래서 핵심 안전 지표를 지키면서 작은 집단에 충분한 학습 시간을 주고, 사용법을 설명하고, 단기 이탈과 장기 숙련을 나눠 봐야 한다.

다만 예술가가 관객을 지배해야 한다는 와일드의 표현을 제품 권력으로 옮기면 위험하다. 사용자를 ‘교육되지 않은 대중’으로 낮춰 보거나 선택지를 일방적으로 끊는 순간 다크 패턴과 독선이 된다. 창작자의 관점을 지키되 이탈, 접근성, 이의 제기 경로를 보장해야 한다. 좋은 취향을 제안할 권리는 타인의 삶을 대신 결정할 권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