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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8 · 05

4부 자기 자신이 되어라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우리는 참되고 아름답고 건강한 개인주의를 얻을 것이다. 누구도 물건과 물건을 나타내는 기호를 쌓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 것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예술이라는 상상의 차원을 빼면 인격이 온전히 표현된 모습을 우리가 본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행동의 세계에서는 결코 본 적이 없다. 몸젠은 카이사르가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얼마나 비극적으로 불안정했는가.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권위에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 카이사르는 대단히 완벽했지만, 그의 완벽함은 너무 위험한 길을 다녔다.

르낭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 위대한 황제는 완벽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지는 끝없는 요구는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는가. 그는 제국이라는 짐 아래 비틀거렸다. 한 인간이 거인처럼 거대한 세계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얼마나 부족한지 스스로 알았다.

내가 말하는 완벽한 인간은 완벽한 조건에서 성장하는 사람이다. 상처 입거나 시달리거나 불구가 되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개성은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힘의 절반을 마찰로 낭비했다.

가령 바이런의 개성은 영국인의 어리석음과 위선, 속물근성과 싸우느라 끔찍하게 소모됐다. 그런 싸움이 언제나 힘을 키워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점을 과장할 때가 많다. 바이런은 우리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을 끝내 다 주지 못했다.

셸리는 조금 더 잘 피했다. 바이런처럼 가능한 한 빨리 영국을 떠났고, 바이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인들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시인인지 알아차렸다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어, 가능한 한 그의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사교계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그래도 셸리의 작품에서도 때때로 반역의 음조가 너무 강하다. 완성된 인격의 음조는 반역이 아니라 평화다.

언젠가 우리가 보게 될 인간의 진정한 개성은 놀라운 것일 터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듯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자랄 것이다. 불화하지 않을 것이고, 논쟁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식을 모으느라 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지혜가 있을 것이다.

그 가치는 물질로 측정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가질 것이다. 무엇을 빼앗겨도 여전히 모든 것을 지닐 만큼 풍요로울 것이다. 늘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자기처럼 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도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그저 아름답게 존재함으로써 우리를 돕는 것과 같다. 인간의 개성은 경이로울 것이다. 어린아이의 개성만큼 경이로울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기독교가 그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원하지 않더라도 개성은 똑같이 확실하게 성장할 것이다. 과거를 걱정하지도,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에 매달리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법 이외의 법, 자기 권위 이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개성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려 했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주 말할 것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그리스도였다.

고대 세계의 문 위에는 ‘너 자신을 알라’고 쓰여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문 위에는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쓰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전한 메시지도 단순히 ‘너 자신이 되어라’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예수가 가난한 이를 말할 때 그가 뜻한 것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며, 부자를 말할 때는 개성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람들을 뜻한다. 예수도 우리처럼 사유재산의 축적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살았다. 그가 전한 복음은 그런 사회에서 빈약하고 해로운 음식을 먹고, 누더기를 입고, 끔찍하고 불결한 집에서 자는 것이 유익하며 건강하고 쾌적하고 품위 있는 환경에서 사는 것이 불리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 견해는 당시에도 틀렸고, 지금 영국에서는 훨씬 더 틀렸다. 북쪽으로 갈수록 삶의 물질적 조건은 더욱 중요해진다. 우리 사회는 고대의 어떤 사회보다 한없이 복잡하며 사치와 빈곤의 격차도 훨씬 크다.

예수가 뜻한 것은 이러했다.

“당신에게는 놀라운 개성이 있다. 그것을 발전시켜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외부의 물건을 쌓거나 소유하는 데 완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의 풍요는 안에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다면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재산은 빼앗길 수 있지만 진짜 재산은 빼앗길 수 없다. 당신의 영혼이라는 보물창고에는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무한히 귀한 것이 있다.

그러니 바깥의 것들이 당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삶을 빚어라. 개인 재산에서도 벗어나라. 그것은 비루한 걱정과 끝없는 노동과 지속적인 잘못을 낳는다. 개인 재산은 개인주의의 모든 걸음을 방해한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 반드시 선하다거나 부자가 반드시 악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은 사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계층 전체로 보면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형편이 낫고, 더 도덕적이고 지적이며 행동도 단정하다. 사회에서 부자보다 돈을 더 많이 생각하는 계층은 딱 하나,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이 가난의 비참함이다.

예수가 말한 것은 인간이 소유한 것, 심지어 행한 것을 통해서도 아니라 오직 그가 어떤 존재인가를 통해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예수를 찾아온 부유한 청년은 국가의 법도 종교의 계명도 어기지 않은 완전히 선량한 시민으로 묘사된다. 그 기묘한 말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그는 지극히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사유재산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당신의 완성을 방해한다. 그것은 발목을 잡는 짐이다. 당신의 개성에는 재산이 필요 없다. 진짜 당신이 누구인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게 될 것이다.”

친구들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 다른 것들을 끊임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다른 것들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인간은 자기 안에서 온전하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은 그들에게 반대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개인주의를 싫어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자기 중심을 지켜야 한다. 누가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주어라. 물질이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욕해도 맞받아치지 말라.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남들이 한 말은 한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그는 그 자신이다. 여론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 사람들이 실제 폭력을 휘둘러도 폭력으로 돌려주지 말라.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영혼은 자유로울 수 있고 개성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며,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무엇보다 남에게 간섭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개성은 대단히 신비롭다. 한 사람이 한 행동만으로 그 사람을 언제나 평가할 수는 없다. 법을 지켜도 무가치할 수 있고, 법을 어겨도 훌륭할 수 있다. 나쁜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나쁜 사람일 수 있다. 사회를 상대로 죄를 짓고도 그 죄를 통해 자기의 진정한 완성을 실현할 수 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사연을 듣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분명 대단했을 것이다. 예수는 여인이 뉘우쳤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토록 강렬하고 놀라웠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했다.

얼마 뒤,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고 예수가 잔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 여인이 들어와 값비싼 향유를 그의 머리에 부었다. 친구들은 여인을 막으며 낭비라고 했다. 향유에 쓴 돈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 같은 데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간의 물질적 필요가 크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정신적 필요는 그보다 더 크다고 했다. 단 한 번의 성스러운 순간에, 스스로 표현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한 인격이 완성될 수 있다고 했다. 세상은 지금도 그 여인을 성인으로 숭배한다.

그렇다. 개인주의에는 생각을 자극하는 점이 많다. 가령 사회주의는 가족생활을 없앤다. 사유재산이 폐지되면 현재 형태의 결혼도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계획의 일부다. 개인주의는 이를 받아들여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법적 구속의 폐지를 자유로 바꾸어 개성의 온전한 발달을 돕고, 남녀의 사랑을 더 놀랍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만든다.

예수는 그 사실을 알았다. 당시 사회에서 가족의 요구가 대단히 강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가족이 찾아와 말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가 내 어머니며 누가 내 형제인가?”라고 물었다. 한 제자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오게 해 달라고 하자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묻게 하라”고 무섭게 답했다. 그는 인격에 어떤 요구도 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인 사람이다. 위대한 시인이나 과학자일 수도 있고, 대학의 젊은 학생이나 황야에서 양을 지키는 사람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 같은 극작가, 스피노자 같은 신학자, 정원에서 노는 아이,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일 수도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에 있는 영혼의 완성을 실현하는지가 중요하다. 도덕과 삶에서 모든 모방은 잘못이다. 오늘날 예루살렘 거리에는 미쳐서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기어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모방 때문에 망가진 삶의 상징이다.

다미앵 신부가 나병 환자와 함께 살러 갔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닮았다. 그 봉사에서 자기 안의 가장 좋은 것을 온전히 실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으로 영혼을 실현한 바그너보다, 노래로 영혼을 실현한 셸리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은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단 하나의 모형은 없다. 불완전한 사람이 있는 만큼 완성의 형태도 많다. 사람은 자선의 요구에 응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획일성의 요구에 굴복하고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미션은 동일한 인간형을 찍는 틀이 아니다

와일드는 완성된 사람의 음조를 반역이 아니라 평화라고 부른다. 늘 조직과 싸워야만 자기 생각을 지킬 수 있다면, 그 갈등에서 용기가 자라기도 하지만 창작에 쓸 힘도 함께 소모된다. “불편을 견디면 강해진다”는 말로 나쁜 환경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다.

강한 문화는 모든 구성원을 창업자의 복제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같은 목표 아래에서도 연구자, 운영자, 디자이너, 영업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탁월해질 여지를 둔다. 가치 선언이 말투, 근무 시간, 사회적 취향까지 규율하기 시작하면 공동의 방향은 획일성으로 변한다.

이 장의 종교 해석과 가족·결혼에 대한 단정은 와일드 자신의 논증이며 보편적 사실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를 말하면서 돌봄과 상호 의존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오늘의 조직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보다, 의존 관계를 숨기지 않고 그 안에서도 거부와 협상의 권리를 가진 사람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차이를 견디는 구조가 개성을 구호에서 현실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