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착취 공장에 짓눌린 주민”과 “정직한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집 없는 사람”에게 질척한 동정을 쏟는다. 그러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을 향해 거친 말을 퍼붓곤 한다.
그러나 무능한 건달들에게 제대로 된 일을 시키려다 제 나이보다 일찍 늙어버리는 고용주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는다. 고용주는 등을 돌리기만 하면 빈둥거리는 ‘일꾼’들을 데리고 오랫동안 참으며 애쓴다.
모든 상점과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솎아낸다. 고용주는 사업에 보탬이 될 능력이 없다고 드러난 ‘일꾼’을 계속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새로 들인다.
경기가 좋을 때도 이 분류는 이어진다. 경기가 나빠 일자리가 부족하면 더 촘촘히 가른다. 무능하고 자격 없는 사람은 밖으로, 영원히 밖으로 밀려난다. 적자생존이다. 고용주는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가장 나은 사람, 곧 가르시아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을 붙잡는다.
나는 아주 영리하지만 자기 사업을 꾸릴 능력은 없고, 남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을 한 명 안다. 그는 고용주가 자기를 억압하고 있거나 곧 억압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의심을 늘 품고 다닌다.
그는 지시를 내리지도 못하고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가르시아에게 전할 편지를 주면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당신이 직접 가져가시오!”
오늘 밤도 이 사람은 해진 외투 사이로 바람을 맞으며 일자리를 찾아 거리를 걷는다. 그를 아는 사람은 누구도 감히 채용하지 않는다. 불만에 늘 불을 붙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말은 통하지 않으며, 두꺼운 밑창을 단 9번 크기 구두의 발끝만이 그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도덕적으로 이토록 뒤틀린 사람도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연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를 가엾게 여기면서 거대한 사업을 끌고 가려고 애쓰는 사람을 위해서도 눈물 한 방울쯤 흘리자.
그들의 근무 시간은 종소리와 함께 끝나지 않는다. 등을 돌리면 무심해지고, 엉성하고 어리석게 일하며, 자기를 먹이고 재워준 사업에 매정하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우려 애쓰다 머리가 빠르게 희어진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 세상이 빈민가 구경에 나선 때, 나는 성공한 사람에게도 위로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큰 역경을 뚫고 다른 사람의 노력을 이끌었지만 막상 성공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 말이다. 남은 것이라고는 소박한 식사와 옷뿐이다.
나도 도시락 통을 들고 나가 일당을 받고 일한 적이 있다. 노동자를 고용한 적도 있다. 양쪽 모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안다.
가난 그 자체에 탁월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더기를 입었다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보증도 되지 않는다. 모든 고용주가 탐욕스럽고 고압적이지 않은 것처럼, 가난한 사람이라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니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이 장은 이 책에서 가장 위험하다. 허버드는 노동 착취를 말하는 목소리를 조롱하고, 해고와 폭력을 사람을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장치처럼 묘사한다. 구조의 권력을 지운 채 고용주의 피로만 확대한다. 원문을 줄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논리가 오랫동안 ‘오너십’이라는 좋은 말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과를 내지 않는 사람과 헤어질 수는 있다. 그 판단에는 명확한 역할, 필요한 자원, 피드백, 개선 기회와 공정한 절차가 먼저 있어야 한다. 책임은 권한과 정보를 받은 만큼만 물을 수 있다. 창업자의 불면이 직원의 무제한 노동을 청구할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