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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3 · 04

3부 어리석은 일관성

어리석은 일관성은 작은 정치가와 철학자와 성직자가 숭배하는, 작은 마음의 도깨비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 같은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걱정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지금 생각하는 것을 오늘 단단한 말로 말하라. 내일은 내일 생각하는 것을 다시 단단한 말로 말하라. 오늘 한 말과 모두 어긋나더라도 그렇게 하라.

“그러면 틀림없이 오해받을 텐데.”

오해받는 것이 그렇게 나쁜가? 피타고라스도,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루터도, 코페르니쿠스도, 갈릴레오도, 뉴턴도 오해받았다. 몸을 입고 세상에 나온 모든 순수하고 지혜로운 영혼이 오해받았다. 위대하다는 것은 오해받는다는 뜻이다.

아무도 자기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의지가 아무리 튀어나가도 존재의 법칙이 그 둘레를 둥글게 감싼다. 안데스와 히말라야의 울퉁불퉁함도 지구라는 구체의 곡선 안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과 같다. 그를 어떤 방식으로 재고 시험하든 중요하지 않다.

성격은 두운시나 알렉산드리아 운문의 연과 같다. 앞에서 읽든 뒤에서 읽든 가로질러 읽든 같은 내용을 쓴다. 신이 허락한 이 즐겁고 뉘우치는 숲의 삶에서 앞날도 지난날도 생각하지 않고 날마다 솔직한 생각을 기록하게 해달라. 의도하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더라도 결국 균형 잡힌 모습이 드러나리라고 믿는다.

내 책에서는 소나무 향이 나고 곤충의 윙윙거림이 울려야 한다. 창밖의 제비가 부리에 문 실오라기나 지푸라기를 내 글에도 엮어 넣어야 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알려진다. 성격은 의지보다 더 크게 가르친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선과 악이 매 순간 숨결을 내뿜는다는 사실은 보지 못한다.

행동이 그 순간마다 정직하고 자연스럽다면 아무리 다양해도 서로 들어맞는다. 하나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은 겉보기에 아무리 달라도 조화를 이룬다. 조금 멀리 떨어지고 생각의 자리에서 조금 높이 올라가면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경향이 모든 행동을 잇는다.

가장 좋은 배의 항로도 수백 번 방향을 바꾼 지그재그 선이다. 충분히 먼 곳에서 바라보면 그 선은 평균적인 방향을 따라 곧게 펴진다. 진실한 행동은 스스로를 설명하고, 다른 진실한 행동도 설명한다. 순응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혼자 판단해 행동하라. 지금까지 혼자 판단해 한 일들이 지금의 당신을 정당화할 것이다. 위대함은 미래에 호소한다. 오늘 남의 시선을 무시하고 옳은 일을 할 만큼 굳세다면, 과거에도 지금의 나를 지켜줄 만큼 옳게 행동했을 것이다.

어떻게 되든 지금 옳은 일을 하라. 언제나 겉모습을 업신여겼다면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성격의 힘은 쌓인다. 지나간 모든 선한 날이 지금의 건강이 되어 작용한다.

원로원과 전쟁터의 영웅이 보여주는 위엄은 무엇으로 상상력을 그토록 사로잡는가? 등 뒤에 늘어선 위대한 날과 승리의 행렬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위에 한데 모인 빛을 비춘다. 눈에 보이는 천사들의 호위대처럼 그와 함께한다.

그 힘이 채텀의 목소리에 천둥을 싣고, 워싱턴의 몸가짐에 품위를 주며, 애덤스의 눈에 미국을 담았다. 명예가 존경스러운 것은 하루살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예는 언제나 오래된 미덕이다. 오늘 생긴 것이 아니므로 오늘 우리가 숭배한다. 우리의 사랑과 경의를 낚으려는 덫이 아니라 스스로 서고 스스로 생겨났기에 사랑하고 경의를 표한다. 젊은이에게서 나타나더라도 그 혈통은 오래되고 흠이 없다.

순응과 일관성이라는 말을 이제 그만 들었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신문에 실어 조롱거리로 삼자. 저녁을 알리는 징 대신 스파르타 피리의 날카로운 소리를 듣자. 이제 절하지도 사과하지도 말자.

위대한 사람이 우리 집에 식사하러 온다. 나는 그의 마음에 들고 싶지 않다. 그가 내 마음에 들고 싶어 하기를 바란다. 나는 여기서 인간을 대표해 서겠다. 친절하게 만들고 싶지만 동시에 진실하게 만들겠다.

매끈한 평범함과 초라한 만족을 모욕하고 꾸짖자. 관습과 장사와 관직의 얼굴에 모든 역사가 내놓은 결론을 던지자. 한 사람이 일하는 곳마다 책임지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행동가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진실한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장소에 속하지 않고 만물의 중심이 된다. 그가 있는 곳에 자연이 있다. 그는 당신과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을 잰다.

보통 우리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을 볼 때 다른 무언가나 다른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성격과 실재는 다른 아무것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온 세상을 대신한다. 사람은 모든 환경이 대수롭지 않게 될 만큼 커져야 한다.

진실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원인이며, 하나의 나라이고, 하나의 시대다. 그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무한한 공간과 사람과 시간이 필요하고 후손은 의뢰인의 행렬처럼 그의 발자취를 따른다.

카이사르라는 한 사람이 태어나자 몇 세기 동안 로마제국이 이어졌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자 수백만의 마음이 그의 정신을 따라 자라고 달라붙어, 마침내 그는 미덕과 인간의 가능성 자체와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제도는 한 사람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다. 수도원 제도는 은둔자 안토니우스의 그림자이고, 종교개혁은 루터의 그림자이며, 퀘이커교는 폭스, 감리교는 웨슬리, 노예제 폐지 운동은 클라크슨의 그림자다. 밀턴은 스키피오를 ‘로마의 절정’이라 불렀다. 역사는 몇몇 굳세고 진지한 사람의 전기로 아주 쉽게 풀린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가치를 알고 만물을 발아래 두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자선원 소년이나 사생아, 침입자처럼 눈치를 보고 몰래 훔치며 숨어 다니지 마라.

거리의 사람은 자기 안에서 탑을 세우고 대리석 신을 조각한 힘에 견줄 만한 가치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것을 바라볼 때 초라함을 느낀다. 궁전과 조각상과 비싼 책은 화려한 마차처럼 낯설고 위협적인 얼굴로 묻는 듯하다. “당신은 누구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그의 것이다. 그의 관심을 얻으려 기다리고, 능력이 나와 차지해주기를 청한다. 그림은 내 판결을 기다린다. 그림이 내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칭찬받을 자격을 결정한다.

길에서 만취해 쓰러진 사람을 공작의 집으로 데려가 씻기고 옷을 입힌 다음 공작의 침대에 눕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깨어난 그에게 모두 공작을 모시듯 극진한 예를 갖추고, 그동안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 이야기가 사랑받는 까닭은 인간의 상태를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세상에서 취객처럼 살지만 때때로 깨어나 이성을 쓰고 자신이 진짜 군주임을 발견한다.

우리의 독서는 거지 같고 아첨으로 가득하다. 역사를 읽으면 상상이 우리를 속인다. 왕국과 영주권, 권력과 영지는 작은 집에 사는 평범한 존과 에드워드, 흔한 하루 일과보다 화려한 낱말이다. 그러나 삶의 실체는 양쪽에서 같고, 그 합계도 같다.

왜 알프레드와 스칸데르베그와 구스타브에게 그토록 머리를 숙이는가? 그들이 덕이 있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미덕을 다 써버렸는가? 그들의 공개되고 이름난 발걸음에 걸렸던 것만큼 중대한 것이 오늘 당신의 사적인 행동에도 걸려 있다. 평범한 사람이 자기 눈으로 보고 독창적으로 행동하게 되면 빛은 왕의 행동에서 시민의 행동으로 옮겨갈 것이다.

세상은 왕에게서 배웠고, 왕은 거대한 상징이 되어 모든 나라의 시선을 자석처럼 끌었다. 그 상징 덕분에 사람은 서로에게 마땅히 보여야 할 존중을 배웠다.

어디서든 사람들은 왕과 귀족과 대지주가 자기만의 법에 따라 걷고, 사람과 사물을 자기 기준으로 재고, 남의 기준을 뒤집고, 은혜를 돈이 아니라 명예로 갚으며, 자기 몸으로 법을 나타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어렴풋이 품은 자기 권리와 아름다움,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를 나타낸 상형문자였다.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어리석은 일관성”은 틀렸다는 증거가 나왔는데도 체면 때문에 버티는 태도다. 어제의 발표와 오늘의 판단이 다를 수 있다. 다만 말을 바꾼 이유와 새 증거를 공개할 책임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해받는 것이 위대함의 증거인 것도 아니다. 위대한 사람도 오해받았지만, 오해받는 모든 사람이 위대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