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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3 · 03

2부 순응하지 않는 사람

사람이 되려는 이는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멸의 월계관을 얻으려는 이는 ‘선함’이라는 이름에 가로막히지 말고 그것이 정말 선한지 살펴야 한다. 끝내 신성한 것은 자기 마음의 온전함뿐이다. 자신 앞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그러면 세상의 찬성도 뒤따를 것이다.

아주 젊었을 때, 소중한 조언자가 교회의 정다운 옛 교리를 자꾸 권하자 나도 모르게 했던 대답이 기억난다. 내가 “온전히 내면에서 살아간다면 전통이 신성하다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라고 말하자 그가 답했다. “하지만 그 충동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올 수도 있지 않겠니?”

나는 말했다. “내게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악마에게서 나온 그대로 살겠습니다.”

내게 신성할 수 있는 법은 내 본성의 법뿐이다. 선과 악은 이쪽저쪽에 손쉽게 옮겨 붙이는 이름일 뿐이다. 내 본성에 맞는 것이 유일하게 옳고, 거스르는 것이 유일하게 그르다. 사람은 모든 반대 앞에서 자기 외에는 전부 이름뿐이고 덧없는 것처럼 처신해야 한다.

우리가 휘장과 이름, 거대한 조직과 죽은 제도 앞에 얼마나 쉽게 항복하는지 생각하면 부끄럽다. 점잖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누구든 마땅한 정도보다 더 나를 흔든다. 나는 똑바로 살아 움직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거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악의와 허영이 박애의 외투를 입으면 그냥 통과시켜야 하는가? 분노에 찬 편협한 사람이 노예제 폐지라는 너그러운 대의를 내걸고 바베이도스의 최신 소식을 들고 찾아온다면,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하는가.

“가서 네 아기를 사랑하라. 네 장작꾼을 사랑하라. 상냥하고 겸손해져라. 그런 품위를 갖춰라. 천 마일 밖 흑인에게 보이는 믿기 어려운 다정함으로 차갑고 무자비한 야심을 칠하지 마라. 멀리 있는 사람을 향한 네 사랑은 집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악의다.”

이런 인사는 거칠고 품위 없겠지만, 진실은 사랑을 가장하는 것보다 아름답다. 당신의 선함에는 날이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함이 아니다. 사랑의 교리가 칭얼대고 훌쩍거릴 때는 그 반대편에서 미움의 교리도 설교해야 한다.

내 안의 재능이 부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형제도 피한다. 문설주에 ‘변덕’이라고 써 붙일 것이다. 끝에 가서는 변덕보다 조금 나은 것이기를 바라지만, 하루 종일 해명에 쓸 수는 없다. 내가 왜 사람을 찾고 왜 만나지 않는지 이유를 밝히리라 기대하지 마라.

또 오늘 어느 선한 사람이 그랬듯 모든 가난한 사람을 좋은 처지에 놓아줄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 마라. 그들이 나의 가난한 사람들인가? 어리석은 박애주의자여, 나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고 나도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 주는 1달러, 10센트, 1센트가 아깝다고 말한다.

정신의 친연성으로 내가 완전히 속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필요할 때 감옥에도 가겠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유행성 자선, 어리석은 사람의 대학 교육, 허영을 위해 세워져 지금도 그렇게 서 있는 예배당, 술꾼에게 주는 구호금과 수천 가지 구호 단체는 다르다. 부끄럽지만 나도 때때로 굴복해 1달러를 낸다. 그것은 사악한 1달러다. 머지않아 인간다운 용기를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평가에서 미덕은 규칙이라기보다 예외다. 한쪽에는 사람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의 미덕이 있다. 사람들은 용기나 자선처럼 선행이라고 부르는 일을 한다. 매일 열병식에 빠진 벌금을 내듯 하는 셈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일을 사과하거나 정상 참작받으려는 행동이다. 환자와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비싼 숙박비를 내는 것과 같다. 그들의 미덕은 고행이다.

나는 속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 내 삶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구경거리가 아니다. 번쩍이다가 흔들리는 삶보다, 비록 낮은 음으로 흐르더라도 진실하고 고른 삶이 훨씬 좋다. 건강하고 맑아 식이요법과 사혈이 필요 없는 삶을 바란다.

당신이 한 사람이라는 직접 증거를 요구한다. 사람 자신을 건너뛰고 그의 행적에 호소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행동을 내가 하든 하지 않든 내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본래부터 가진 권리를 누리면서 사용료를 낼 수는 없다. 가진 재능이 적고 보잘것없더라도 나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을 나나 동료에게 확인시키려고 간접 증거를 댈 필요는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나와 관련된 전부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계없다. 실제 삶과 지적 삶 모두에서 따르기 어려운 이 규칙 하나가 위대함과 비루함을 가른다. 나의 의무를 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언제나 만나게 되므로 더욱 어렵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의견에 따라 살기 쉽다. 고독 속에서는 자기 의견에 따라 살기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군중 한가운데서도 고독의 독립을 한없이 부드럽게 지키는 사람이다.

내게 죽어버린 관습을 따를 때 생기는 문제는 힘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잃고 성격의 윤곽도 흐려진다. 죽은 교회를 떠받치고 죽은 성서 협회에 기부하고, 정부 편이든 반대편이든 거대 정당에 맞춰 투표하고, 비루한 가장들처럼 상을 차린다면 그 가림막 아래서 당신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당연히 본래 삶에 쓸 힘도 그만큼 빠져나간다.

하지만 자기 일을 하라. 그러면 내가 당신을 알게 된다. 자기 일을 하라. 그러면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은 순응이라는 놀이가 얼마나 눈가림 놀이인지 살펴야 한다. 당신의 종파를 알면 나는 논증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한 설교자가 자기 교회 제도 하나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설교 본문과 주제로 삼겠다고 알린다. 그가 새롭고 자발적인 말을 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미리 알지 않는가? 제도의 근거를 검토하는 척 떠들어도 실제로는 검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는 허락받은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은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한 사람이 아니라 교구 목사로 말한다. 고용된 변호사이면서 재판관인 척하는 가장 공허한 몸짓이다.

대부분 사람은 이런저런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어느 의견 공동체에 자신을 묶었다. 이런 순응은 몇 가지 사실만 거짓으로 만들거나 몇 개의 거짓말만 낳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참되지 않다. 그들의 2는 진짜 2가 아니고, 4도 진짜 4가 아니다. 내뱉는 말마다 우리를 답답하게 하지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는 동안 자연은 우리가 들어간 정당의 죄수복을 재빨리 입힌다. 얼굴과 몸도 같은 모양을 띠고, 점차 가장 온순하고 당나귀 같은 표정을 얻는다.

특히 굴욕적인 경험이 하나 있다. 역사 전체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칭찬받을 때의 어리석은 얼굴’이다. 불편한 모임에서 흥미도 없는 대화에 답하려고 억지웃음을 짓는 얼굴 말이다. 저절로 움직이지 않고 비루한 의지가 억지로 당긴 근육은 얼굴 가장자리에서 굳어 몹시 불쾌한 느낌을 남긴다.

세상은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못마땅해하며 채찍질한다. 그러니 사람은 언짢은 얼굴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길거리와 친구의 응접실에서 주변 사람들은 그를 곁눈질한다. 그 반감이 그 자신의 반감처럼 경멸과 저항에서 나왔다면 슬픈 얼굴로 집에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군중의 언짢은 얼굴은 다정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깊은 까닭이 없다. 바람이 불고 신문이 지시하는 대로 썼다 벗었다 한다.

그래도 군중의 불만은 원로원이나 대학의 불만보다 더 무섭다. 세상을 아는 단단한 사람이라면 교양 있는 계층의 분노는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다. 그들의 분노는 점잖고 조심스럽다. 자신도 공격받기 쉬워 겁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성적인 분노에 민중의 격분까지 더해지고, 배우지 못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들고일어나 사회 밑바닥의 지성 없는 야만적 힘이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내면,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신적인 태도로 다루려면 관대함과 신앙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자기 신뢰를 포기하게 만드는 또 다른 공포는 일관성이다. 남들이 우리의 궤도를 계산할 자료는 과거의 행동과 말뿐이고, 우리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한다. 그래서 지난 행동과 말을 떠받든다.

그러나 왜 자꾸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가? 여기저기 공개된 자리에서 했던 말과 어긋날까 봐 기억의 시체를 왜 끌고 다니는가? 자기모순에 빠지면 어떤가?

기억만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원칙인 듯하다. 순수하게 기억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천 개의 눈이 달린 현재로 데려와 심판하고, 언제나 새로운 날을 살아야 한다. 형이상학에서는 신에게 인격이 없다고 주장했더라도, 영혼에 경건한 움직임이 일어나면 신에게 형상과 색을 입히게 되더라도 마음과 삶을 내맡겨라. 요셉이 유혹하는 여인의 손에 겉옷을 남긴 것처럼 이론을 버리고 달아나라.


2026년 스타트업에서 읽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계없다’는 말은 의사결정권을 되찾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고객·동료·약자의 목소리까지 잡음으로 취급하는 순간 독립은 무책임이 된다. 이 부의 자선 비판과 가난한 군중을 향한 멸시는 에머슨 자신의 계급적 시야를 드러낸다. 사회적 명분으로 가까운 사람을 학대하는 위선을 비판한 통찰은 살리되, 도움을 낯선 이에게까지 넓히는 연대 자체를 ‘사악한 1달러’로 볼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