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논리학의 문제에 다가가서 특히 중요한 개념인 ‘현실’을 생각해 보자.
명료함을 익숙함이라는 뜻으로 쓴다면 현실보다 명료한 관념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이 완전한 자신감을 갖고 쓴다. 그러나 둘째 단계의 명료함, 곧 추상적인 정의를 제시하라고 하면 사색에 익숙한 사람들조차 대부분 곤란해할 것이다.
현실과 그 반대인 허구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런 정의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구는 누군가의 상상이 만든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찍어 넣은 성질을 갖는다. 어떤 성질이 당신이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외부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 정신 안에는 생각에 의존하면서도,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실재하는 현상도 있다. 그 성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달렸지만, 그 성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달린 것은 아니다.
가령 누군가 실제로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은 정신 현상으로서 실제로 존재한다. 그가 무엇을 꿈꾸었는가는 누군가가 ‘그는 이런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의견과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반면 꿈을 꾼 사실이 아니라 꿈속의 대상을 생각하면, 그 대상이 독특한 성질을 지니는 이유는 그런 성질을 가진 것으로 꿈꾸었다는 사실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이란 그 성질이 누구든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무관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가 아무리 만족스러워 보여도 이것만으로 현실이라는 관념이 완전히 명료해졌다고 여긴다면 큰 잘못이다. 이제 우리의 규칙을 적용해 보자.
다른 모든 성질과 마찬가지로 현실은 현실적인 것들이 낳는 독특하고 감각 가능한 효과에 있다. 현실의 사물이 낳는 유일한 효과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일으키는 감각은 모두 믿음의 형태로 의식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참된 믿음, 곧 현실에 대한 믿음과 거짓 믿음, 곧 허구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보았듯 완전히 발전한 의미의 참과 거짓은 오직 의견을 고정하는 과학적 방법에 속한다. 받아들일 명제를 마음대로 고르는 사람에게 ‘진리’라는 말은 자신이 고른 것을 끝까지 붙들겠다는 결심을 강조하는 말일 뿐이다.
물론 완고함의 방법만이 독점적으로 지배한 적은 없다. 인간에게 추론은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도 중세 암흑기의 문헌에서 그 훌륭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는 미나리아재비과 독초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일으켰다는 시 구절을 주석하며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주저 없이 이렇게 알려 준다. 헬레보루스와 소크라테스는 저명한 그리스 철학자 두 사람이었고, 소크라테스는 헬레보루스에게 논쟁에서 패하자 상심해 죽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무작위로 고른 의견을 ‘어쩌면’이라는 단서조차 없이 받아들이고 가르친 사람이 진리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논쟁에서 패배한다면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진짜 소크라테스의 정신은, 토론을 단순한 싸움으로 여긴 듯한 주석가의 순진한 생각과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철학이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지만 신학이 아직 완전히 지배하기 전, 교수들은 아무도 차지하지 않았고 튼튼해 보이는 철학적 진지를 하나씩 붙잡는 방식으로 일했던 듯하다. 그 안에 참호를 파고, 때때로 밖으로 돌격해 다른 사람과 싸웠다.
그 논쟁에 관해 남은 빈약한 기록만 보아도 명목론과 실재론 문제를 두고 한 시대의 교사들이 열두 개가 넘는 의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 누구 못지않게 철학적이었던 아벨라르의 《나의 불행한 이야기》 첫 부분을 읽어 보라. 전투의 기운이 가득하다. 그에게 진리는 자기만의 요새였다.
권위의 방법이 지배했을 때 진리는 가톨릭 신앙 이상의 뜻을 거의 갖지 못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의 모든 노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믿음과 교회에 대한 믿음을 조화시키는 데 향했다. 그들의 묵직한 책을 아무리 뒤져도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가는 논증을 찾기 어렵다.
서로 다른 신앙이 나란히 번성하는 곳에서는 개종자가 새로 받아들인 신앙의 집단에서조차 멸시받는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진리를 찾는다는 관념이 충성이라는 관념으로 그만큼 완전히 대체된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에는 진리 개념의 결함이 덜 눈에 띄었다. 그래도 과학자의 눈에는 철학자가 사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일보다 어떤 믿음이 자기 체계와 가장 잘 어울리는지 묻는 데 더 마음을 쓴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선험적 방법을 따르는 사람에게 사실을 들이밀어 생각을 바꾸게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옹호하는 의견이 다른 곳에서 스스로 세운 주장과 모순된다고 보여 주면 곧 철회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논쟁이 언젠가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한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으므로 믿음은 결국 하나로 정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의견을 고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쓰면 다른 결과에 이르는 방법에 만족한다. 이는 그들이 진리가 무엇인지 단단히 붙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반면 과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탐구 절차를 충분히 멀리 밀고 나가기만 하면, 그 절차를 적용할 수 있는 모든 질문에 하나의 확실한 해답이 나온다고 굳게 믿는다.
한 사람은 금성의 태양면 통과와 별빛의 광행차를 연구해 빛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화성의 충과 목성 위성의 식을 이용할 수 있다. 셋째는 피조의 방법을, 넷째는 푸코의 방법을, 다섯째는 리사주 곡선의 운동을 이용한다. 여섯째부터 아홉째까지는 정전기와 동전기의 측정값을 비교하는 서로 다른 방법을 쓸 수 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각자가 방법과 절차를 다듬을수록 결과들은 정해진 중심을 향해 꾸준히 가까워진다. 모든 과학 연구가 그렇다.
서로 적대적인 견해에서 출발한 정신들도 탐구가 진행되면 자기 바깥의 힘에 이끌려 같은 결론으로 향한다. 이 생각의 활동은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미리 정해진 목표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점에서 운명의 작용과 같다. 관점을 바꾸거나, 연구할 사실을 달리 고르거나, 정신의 타고난 성향을 따르더라도 예정된 의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위대한 법칙이 진리와 현실이라는 개념에 담겨 있다.
탐구하는 모든 사람이 마침내 동의하게 될 수밖에 없는 의견이 우리가 말하는 진리다. 그 의견이 나타내는 대상이 현실이다.
나는 현실을 이렇게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 설명은 앞에서 내린 현실의 추상적 정의와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현실의 성질이 결국 그것에 관해 생각될 내용에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답은 두 가지다. 한편으로 현실은 생각 일반에서 반드시 독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나 또는 유한한 수의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서 독립한다. 다른 한편으로 최종 의견의 대상은 그 의견이 무엇인지에 달려 있지만, 그 최종 의견이 무엇인지는 당신이나 나, 어떤 개인의 생각에도 달려 있지 않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비뚤어짐은 의견이 정착되는 일을 끝없이 늦출 수 있다. 인류가 존재하는 내내 임의의 명제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충분히 오래 탐구했을 때에만 생길 수 있는 믿음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류가 사라진 뒤 탐구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다른 종족이 생긴다면 그들 역시 마침내 그 참된 의견에 이를 것이다.
“땅에 쓰러진 진리는 다시 일어난다.” 탐구가 끝까지 진행된 뒤 나올 의견은 누군가가 지금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인 것의 실재성은 한 가지 실제 사실에 달려 있다. 탐구를 충분히 오래 이어 가면 결국 그것에 대한 믿음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역사의 사소한 사실들, 다시는 복원할 수 없게 잊힌 일들, 사라진 고대의 책, 묻힌 비밀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고요한 광채를 품은 수많은 보석이
어둡고 헤아릴 수 없는 바닷속 동굴에 놓여 있고,
수많은 꽃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붉게 피어나
사막의 공기에 향기를 헛되이 흩뿌린다.
우리가 알 길이 영영 없다는 이유로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어떤 과학자들의 예측처럼 우주가 죽고 모든 생명이 영원히 사라진 뒤에도, 그것을 아는 정신 하나 없이 원자들의 충돌은 이어지지 않겠는가?
내 답은 이렇다. 어떤 지식 상태에서도 미지의 양과 알려진 것의 양 사이 비율을 표현할 만큼 큰 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도 명료한 의미를 지닌 어떤 특정 질문에 관해, 탐구를 충분히 멀리 진행해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철학적이지 않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간이 존재해 온 시간보다 더 오랜 세월을 지나 우리에게 도착한 별빛을 보고 그 별을 이루는 물질을 알아내리라고 누가 말할 수 있었겠는가? 몇백 년 뒤 우리가 무엇을 모를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지난 백 년과 같은 활기로 과학 연구를 만 년 동안 계속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가 짐작할 수 있는가?
백만 년, 십억 년 또는 원하는 만큼 긴 세월 동안 계속된다면 끝내 풀리지 않을 질문이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먼 이야기를 왜 그토록 중요하게 다루느냐는 반론도 나올 것이다. 실천적인 차이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당신의 원칙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인정한다. 완전한 어둠 속 바다 밑의 돌이 빛난다고 말하든 빛나지 않는다고 말하든 차이는 거의 없다. 정확히는 아마도 차이가 없다. 그 돌이 내일 건져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다 밑에 보석이 있다거나 아무도 찾지 않은 사막에 꽃이 있다는 명제도, 눌러 보지 않은 다이아몬드가 단단하다는 명제와 같다. 그것들은 우리 관념의 의미보다는 언어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와 더 관계가 있다.
그래도 우리의 규칙을 적용한 덕분에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관념이 어떤 사실 위에 놓였는지를 아주 명료하게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과학적 방법으로 믿음을 고정하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 이론을 제시한다 해도 아주 기이하고 건방진 주장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쓸모보다 호기심을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분야다. 물에 잠긴 암초에 관한 지식처럼, 그것을 피하는 데 가장 유용하다. 지금은 존재론으로 독자를 더 괴롭히지 않겠다.
나는 원했던 것보다 이미 이 길로 훨씬 더 멀리 들어왔다. 수학과 심리학과 그 밖의 온갖 난해한 것을 너무 많이 먹였으니 독자는 벌써 나를 떠났고, 내가 지금 쓰는 글은 식자공과 교정자만 읽을지도 모른다. 주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
논리학에는 왕도가 없다. 정말 가치 있는 관념은 오직 주의를 바짝 기울이는 대가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관념에 관한 한 대중이 싸고 조악한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 다음 글에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로 돌아가 다시는 곁길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이 글을 헤치며 여기까지 온 독자는 다음 글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지루하게 발전시킨 내용이 과학적 추론의 규칙을 밝히는 데 얼마나 아름답게 적용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과학 논리학의 문턱도 넘지 않았다. 관념을 명료하게 만드는 법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관념은 아무리 명료해도 거짓일 수 있다. 이제 관념을 참되게 만드는 법을 연구해야 한다.
수천 가지 형태로 증식하고 사방으로 퍼져 문명을 앞으로 밀며 인간의 존엄을 세우는, 생명력 있고 번식하는 관념을 낳는 법은 아직 규칙으로 정리되지 않은 기술이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는 그 비밀을 얼마간 암시한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퍼스가 말한 진리는 창업자의 확신도, 팀의 합의도, 고객 투표의 과반도 아니다. 같은 질문을 두고 관찰과 실험을 고쳐 가며 충분히 오래 탐구할 때 서로 다른 출발점의 사람들이 수렴하게 될 의견이다. 현재의 지표나 인터뷰 결과는 그 끝이 아니라 탐구가 움직이는 한 장면이다.
이 관점은 ‘데이터 기반’이라는 말보다 까다롭다. 마음에 드는 데이터만 고르는 순간 우리는 탐구가 아니라 자기 요새를 방어하고 있다. 좋은 팀은 반론에서 이기는 팀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확인한 결과들이 같은 중심에 가까워지는지 살피고 틀렸을 때 더 빨리 의견을 고치는 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