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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20 · 07

6부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다

시릴 분명 아주 기묘한 이론이야. 하지만 이론을 완성하려면 삶뿐 아니라 자연도 예술을 모방한다는 사실을 보여 줘야 해. 증명할 준비가 됐나?

비비언 친구여, 나는 무엇이든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네.

시릴 그렇다면 자연은 풍경화가를 따라 하고, 화가에게서 자기 효과를 빌려 온다는 건가?

비비언 물론이지. 인상주의자들이 아니라면, 우리 거리로 스멀스멀 내려와 가스등을 흐리게 하고 집들을 거대한 그림자로 바꾸는 저 경이로운 갈색 안개를 어디서 얻었겠나? 그들과 그들의 스승이 아니라면, 강 위에 내려앉아 아치형 다리와 흔들리는 바지선을 희미하고 우아한 형상으로 바꾸는 사랑스러운 은빛 물안개를 누구에게 빚졌겠어?

지난 10년 동안 런던의 날씨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는 전적으로 특정 예술 유파의 작품이야. 자네가 웃는군. 과학이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은 우리를 낳은 위대한 어머니가 아니야. 자연은 우리가 만든 창조물이지. 자연이 생명을 얻는 곳은 우리의 머릿속이야. 사물은 우리가 보기 때문에 존재해. 우리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지는 우리에게 영향을 준 예술에 달려 있고.

어떤 것을 바라보는 일과 그것을 보는 일은 전혀 달라. 우리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기 전까지 그 사물을 진정으로 보지 못해.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오직 그때 비로소 그것은 존재하기 시작하지.

오늘날 사람들이 안개를 보는 것은 안개가 있기 때문이 아니야. 시인과 화가가 그 효과에 깃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보도록 가르쳤기 때문이지. 런던에는 수백 년 전부터 안개가 있었을 거야. 아마 그랬겠지.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보지 않았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개에 관해 아는 것이 없어. 예술이 발명하기 전까지 안개는 존재하지 않았어.

우리가 보는 자연은 이미 배운 자연이다

안개 낀 템스강 위 다리와 배, 멀리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흐릿하게 보이는 모네의 풍경화
클로드 모네, 《웨스트민스터의 템스강》, 1871년. 와일드는 화가들이 안개의 아름다움을 발명한 뒤에야 런던 사람들이 안개를 보기 시작했다고 농담한다.Claude Monet · 1871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이제는 인정해야겠지만, 안개가 너무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 한 무리의 틀에 박힌 수법이 되어 버렸고, 그 방법이 과장된 사실주의로 흐른 탓에 따분한 사람들은 기관지염에 걸리지. 교양 있는 사람은 효과를 포착하지만 교양 없는 사람은 감기에 걸려. 그러니 우리도 인간적인 마음을 발휘해 예술에게 그 경이로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달라고 청하세.

실제로 예술은 이미 그렇게 했어. 요즘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기묘한 연보라 얼룩과 가만있지 못하는 보랏빛 그림자를 품은 떨리는 흰 햇빛은 예술이 가장 최근에 품은 변덕이야. 대체로 자연은 그것을 아주 훌륭하게 재현하고 있지. 전에는 코로와 도비니를 내놓던 자연이 이제는 절묘한 모네와 황홀한 피사로를 내놓는군.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자연이 완전히 현대적이 되는 순간도 있어. 물론 언제나 자연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자연은 불행한 처지에 놓였거든. 예술은 비길 데 없이 독특한 효과를 하나 창조하고 나면 다른 것으로 옮겨 가. 반면 자연은 모방이 가장 진실한 모욕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우리가 진절머리를 낼 때까지 그 효과를 되풀이하지.

이를테면 오늘날 진정으로 교양 있는 사람은 석양의 아름다움을 입에 올리지 않아. 석양은 완전히 낡은 유행이야. 터너가 예술의 최신 소식이었던 시대에 속한 물건이지. 석양을 찬미하는 것은 취향이 지방에 머물러 있다는 명백한 표시야. 그런데도 석양은 계속 나타나.

어제저녁 아룬델 부인이 나를 창가로 데려가 자신이 ‘장엄한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을 꼭 보라고 했어. 물론 볼 수밖에 없었지. 그 부인은 터무니없이 예쁜 속물이라 무엇 하나 거절할 수가 없거든. 그래서 본 것이 무엇이었겠나? 이류 터너 한 점에 불과했어. 터너의 나쁜 시기에 나온 그림인데, 화가의 가장 나쁜 결점만 과장하고 또 강조한 수준이었지.

물론 삶도 아주 자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는 점은 기꺼이 인정하겠네. 삶이 가짜 르네와 모조 보트랭을 만들어 내듯, 자연은 어떤 날에는 수상쩍은 코이프를, 다른 날에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루소를 내놓지. 그래도 자연이 그런 짓을 할 때 훨씬 더 짜증이 나. 너무 어리석고, 너무 뻔하며, 너무 불필요해 보이거든. 가짜 보트랭은 즐거울 수도 있지만 수상쩍은 코이프는 견딜 수 없어.

그렇다고 자연에게 지나치게 가혹해지고 싶지는 않군. 영국해협, 특히 헤이스팅스의 바다가 회색 진주에 노란빛을 얹은 헨리 무어의 그림처럼 그렇게 자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예술이 더 다양해지면 자연도 틀림없이 더 다양해지겠지.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사실은 이제 자연의 가장 악랄한 적조차 부정하지 못할 거야. 자연이 문명인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자, 이제 내 이론을 만족할 만큼 증명했나?

시릴 불만족할 만큼 증명했네. 그쪽이 더 낫지. 하지만 삶과 자연에 그런 기묘한 모방 본능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예술이 자기 시대의 기질과 시대정신,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의 탄생에 영향을 준 도덕적·사회적 조건을 표현한다는 것은 자네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비비언 절대로! 예술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아. 이것이 내 새로운 미학의 원칙이야. 페이터 씨가 강조한 형식과 내용의 생명력 있는 관계보다도 이 원칙 때문에 음악은 모든 예술의 전형이 되지.

국가와 개인은 삶의 비밀이라 할 만큼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허영심을 지녀서, 뮤즈가 언제나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 상상적 예술의 고요한 위엄 속에서 자기들의 흐리고 격렬한 감정을 비추는 거울을 찾으려 하고, 삶을 노래하는 자가 아폴론이 아니라 마르시아스라는 사실을 늘 잊지.

예술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동굴의 그림자에 등을 돌린 채 자기 자신의 완전함을 드러내. 경이롭고 꽃잎이 수없이 많은 장미가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군중은 자기들의 역사가 이야기되고 있으며, 자기들의 정신이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믿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가장 높은 예술은 인간 정신이라는 짐을 거부해. 예술에 대한 열광이나 숭고한 열정, 인간 의식의 거대한 각성보다 새로운 매체와 신선한 재료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예술은 순전히 자기 노선을 따라 발전하지. 어느 시대의 상징도 아니야. 오히려 시대들이 예술의 상징이지.

예술이 시간과 장소, 사람을 재현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조차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 예술이 대상을 더 충실히 모방할수록 그 시대정신은 오히려 덜 보여 준다는 사실 말이야.

당시 사실주의 예술가들이 즐겨 쓰던 지저분한 자주색 반암과 얼룩진 벽옥에서 로마 황제들의 사악한 얼굴이 우리를 쳐다봐. 우리는 그 잔인한 입술과 무겁고 감각적인 턱에서 제국 몰락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티베리우스의 악덕이 그 최고의 문명을 파괴하지 못한 것은 안토니누스 황제들의 미덕이 그것을 구하지 못한 것과 같아. 제국은 다른 이유, 훨씬 덜 흥미로운 이유로 무너졌지.

시스티나 성당의 무녀와 예언자들은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해방된 정신의 새로운 탄생을 누군가에게 설명해 줄지도 몰라. 하지만 네덜란드 미술의 술 취한 촌부와 악을 쓰는 농민이 네덜란드의 위대한 영혼에 관해 무엇을 말해 주나?

예술은 더 추상적이고 더 이상적일수록 그 시대의 기질을 더 많이 드러내. 한 나라를 예술로 이해하고 싶다면 건축이나 음악을 보게.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같은 거리도 무엇을 보고 난 뒤 걷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대시보드를 오래 본 팀은 세상을 지표로 보고, 특정 소셜미디어에 익숙한 팀은 모든 이야기를 그 플랫폼의 화면 비율과 재생 시간으로 상상한다. 기술은 현실을 전달하는 중립적인 창이 아니라 무엇이 보일지를 가르치는 하나의 양식이다.

생성형 AI는 이미 존재하는 양식을 대량으로 재생산한다. 이때 가장 쉬운 결과는 익숙하지만 어디서 본 듯한 평균값이다. 와일드의 역설이 요구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팀이 어떤 렌즈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것을 보게 하는 새로운 형식을 발명하라는 요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