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릴
그 견해는 반론의 여지가 있어 보여. 나는 ‘봄의 숲이 주는 충동’을 어느 정도 믿는 편이야. 물론 그 충동의 예술적 가치는 전적으로 어떤 기질이 받아들이느냐에 달렸지. 그렇다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위대한 개성으로 나아간다는 뜻일 뿐일 거야. 자네도 동의하리라 생각하네. 어쨌든 글을 계속 읽게.
비비언 읽는다
“예술은 추상적 장식에서 시작한다. 비현실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순전히 상상적이고 즐거운 작업이다. 이것이 첫 단계다.
그다음 삶이 이 새로운 경이에 매혹돼 마법의 원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술은 삶을 거친 재료의 일부로 가져와 다시 만들고 새로운 형식으로 빚는다. 사실에는 완전히 무심하다. 발명하고 상상하고 꿈꾸며, 아름다운 문체와 장식적 또는 이상적 처리라는 뚫을 수 없는 장벽을 자기와 현실 사이에 둔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삶이 우위를 차지해 예술을 황야로 몰아낸다. 이것이 진짜 쇠퇴다. 오늘날 우리가 앓는 병도 이것이다.
영국 연극을 보라. 처음 수도사들의 손에서 극예술은 추상적이고 장식적이며 신화적이었다. 다음에는 삶을 자기 밑에 두고 삶의 외형 일부를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종족을 창조했다.
그들의 슬픔은 인간이 실제로 느낀 어떤 슬픔보다 끔찍했고, 기쁨은 연인의 기쁨보다 강렬했다. 티탄의 분노와 신의 고요함을 지녔으며, 죄도 미덕도 기괴하고 경이로웠다.
극예술은 그들에게 실제로 쓰는 말과 다른 언어를 주었다. 울려 퍼지는 음악과 달콤한 리듬으로 가득한 언어, 장중한 운율로 위엄을 갖추거나 기발한 각운으로 섬세해진 언어, 놀라운 낱말을 보석처럼 박고 고상한 표현으로 풍요로워진 언어였다.
자기 아이들에게 낯선 옷을 입히고 가면을 주었다. 명령이 떨어지자 고대 세계가 대리석 무덤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카이사르가 부활한 로마의 거리를 활보했고, 또 하나의 클레오파트라가 보랏빛 돛과 피리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노를 달고 강을 거슬러 안티오키아로 갔다.
오래된 신화와 전설과 꿈이 형체와 실체를 얻었다.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였다. 예술의 목적이 단순한 진실이 아니라 복잡한 아름다움임을 알아보지 못한 극작가는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옳았다. 예술 자체가 사실 과장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신 그 자체인 선택은 강조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곧 삶이 형식의 완벽함을 깨뜨렸다. 셰익스피어에게서도 끝의 시작을 볼 수 있다. 후기 희곡에서 무운시가 점차 무너지고, 산문이 우세해지고, 인물 묘사가 지나치게 중요해지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거칠고 천박하며 과장되고 환상적이고 심지어 외설적인 대목은 적지 않다. 삶이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를 요구하며,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표현돼야 할 아름다운 문체의 개입을 거부한 결과다.
셰익스피어는 결코 흠 없는 예술가가 아니다. 삶으로 곧장 가서 삶의 자연스러운 말을 빌리는 일을 너무 좋아한다. 예술이 상상적 매체를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잊는다.
괴테는 어디에선가 이렇게 썼다.
‘한계 안에서 작업할 때 비로소 거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예술의 한계이자 조건은 문체다. 셰익스피어의 사실주의를 더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템페스트》는 가장 완벽한 철회의 노래다.
우리가 지적하려던 것은 하나다. 엘리자베스 시대와 제임스 1세 시대 예술가들의 장엄한 작품은 자기 해체의 씨앗을 안에 품고 있었다. 삶을 거친 재료로 사용해 힘을 얻었다면, 삶을 예술적 방법으로 사용하면서 모든 약점을 얻었다.
창조적 매체 대신 모방적 매체를 택하고 상상적 형식을 포기한 필연적 결과가 현대 영국의 멜로드라마다.
그 희곡의 인물은 무대 밖에서 말하듯 무대 위에서 말한다. 포부도 없고 발음의 격조도 없다. 삶에서 곧장 가져와 가장 작은 세부까지 천박함을 재현한다. 실제 사람의 걸음걸이와 태도, 옷차림, 억양을 보여준다. 삼등 열차 객실에 들어가도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희곡은 얼마나 지루한가!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목표인 현실감조차 만들지 못한다.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실주의는 완전한 실패다.
연극과 소설에 참인 것은 장식예술에도 똑같이 참이다. 유럽 장식예술의 역사는 두 정신의 투쟁이다. 모방을 솔직히 거부하고, 예술적 관습을 사랑하고, 자연의 사물을 실제처럼 재현하기 싫어하는 동방의 정신과 우리 자신의 모방 정신이 맞선다.
비잔티움·시칠리아·스페인처럼 직접 접촉으로 동방의 정신이 우세했던 곳, 십자군의 영향으로 그 정신이 퍼진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아름답고 상상력 있는 작품이 나왔다. 삶에서 보이는 사물은 예술적 관습으로 바뀌고, 삶에 없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위해 발명되고 만들어졌다.
하지만 삶과 자연으로 돌아간 곳에서는 언제나 작품이 천박하고 흔하며 재미없어졌다.
공중 원근 효과와 복잡한 원근법, 낭비된 하늘의 넓은 면적, 충실하고 고된 사실주의를 담은 현대 태피스트리에는 아름다움이 전혀 없다. 독일의 그림 유리는 정말 끔찍하다.
영국에서도 만들 법한 카펫을 짜기 시작했다. 동방의 방법과 정신으로 돌아간 덕분이다. 20년 전 우리의 깔개와 카펫은 엄숙하고 우울한 진실, 어리석은 자연 숭배, 보이는 사물의 저열한 복제로 가득했다. 이제는 속물에게조차 웃음거리가 됐다.
교양 있는 이슬람교도가 한번은 우리에게 말했다.
‘당신들 기독교인은 제4계명을 잘못 해석하느라 너무 바빠서 제2계명을 예술적으로 적용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옳았다. 진실은 이것이다. 예술을 배울 올바른 학교는 삶이 아니라 예술이다.”

이제 내게는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을 읽어주겠네.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다. 시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워즈워스라는 불운한 예외를 빼면 시인들은 높은 사명에 충실했고,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보편적으로 인정받았으니까.
현대의 얕고 옹졸한 반학자들이 역사를 검증하려고 애쓰는데도 정당하게 ‘거짓말의 아버지’라고 불릴 헤로도토스, 키케로가 발표한 연설문과 수에토니우스의 전기, 전성기의 타키투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한노의 《항해기》, 초기 연대기, 성인전, 프루아사르와 토머스 맬러리 경,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올라우스 마그누스와 알드로반디, 경이로운 《기이한 사건과 징조의 연대기》를 쓴 콘라트 리코스테네스,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 카사노바의 회고록, 디포의 《페스트 연대기》, 보즈웰의 《새뮤얼 존슨 전기》, 나폴레옹의 급보, 그리고 우리 시대 칼라일의 작품을 보라. 칼라일의 《프랑스 혁명》은 이제껏 쓰인 가장 매혹적인 역사소설 가운데 하나다.
이 모든 글에서 사실은 알맞게 낮은 자리에 놓이거나, 지루하다는 일반 원칙에 따라 완전히 제외됐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실은 역사 안에서 자리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공상의 영토를 빼앗고 낭만의 왕국을 침략했다. 차가운 손길이 모든 것 위에 놓였다. 사실은 인류를 천박하게 만든다.
미국의 거친 상업주의, 물질만 중시하는 정신, 시적인 면을 향한 무관심, 상상력과 높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부족한 까닭은 전적으로 그 나라가 자기 고백에 따르면 거짓말을 할 능력이 없던 사람을 국민적 영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이후의 거짓말쟁이
조지 워싱턴과 벚나무 이야기가 문학 전체의 어떤 도덕 이야기보다 짧은 시간에 더 큰 해를 끼쳤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릴
이보게!
비비언
사실이야.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벚나무 이야기가 완전한 신화라는 것이지.
그래도 내가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예술적 미래를 지나치게 비관한다고 생각하지는 말게. 이걸 들어보게.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장할 재치도 이야기를 꾸밀 천재성도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지루하고 교화적인 대화에 질리고, 회상은 늘 기억에 근거하고 주장은 언제나 개연성 안에 머물며 곁에 있는 하찮은 속물에게 언제든 확인받을 수 있는 똑똑한 사람에게 지친 사회는 언젠가 잃어버린 지도자, 교양 있고 매혹적인 거짓말쟁이에게 돌아가야 한다.
거친 사냥에 한 번도 나간 적 없으면서 해 질 무렵 떠돌이 동굴 사람들에게 자기가 벽옥 동굴의 보랏빛 어둠에서 메가테리움을 끌어냈고, 매머드와 일대일로 싸워 죽인 뒤 금빛 엄니를 가져왔다고 처음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자랑 많은 현대 인류학자 가운데 아무도 평범한 용기를 내어 그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았다.
그 사람의 이름과 종족이 무엇이든 진정한 사교의 창시자였음은 분명하다. 거짓말쟁이의 목표는 단지 매혹하고 즐겁게 하며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명사회의 토대다. 그가 없다면 위대한 사람의 저택에서 여는 만찬도 왕립학회의 강연, 작가협회의 토론, 버넌드 씨의 소극만큼이나 지루할 것이다.
그를 환영하는 것은 사회만이 아니다. 사실주의의 감옥을 깨고 나온 예술은 달려가 그의 거짓되고 아름다운 입술에 입맞출 것이다. 모든 예술적 표현의 위대한 비밀, 진실이 전적으로 문체의 문제라는 비밀을 그만이 안다고 예술은 여기기 때문이다.
가련하고 개연적이며 흥미롭지 않은 인간의 삶은 허버트 스펜서와 과학적 역사학자, 통계 편찬자를 위해 자기를 되풀이하는 일에 지칠 것이다. 거짓말쟁이의 뒤를 얌전히 따르며 그가 말한 경이 가운데 몇 가지를 단순하고 배우지 못한 방식으로 재현하려 애쓸 것이다.
물론 늘 비평가는 있을 것이다. 《새터데이 리뷰》의 어느 필자처럼 동화 작가가 자연사를 잘 모른다고 진지하게 꾸짖고, 자기에게 상상력이 없다는 사실로 상상의 작품을 재는 사람들이다.
자기 정원의 주목나무보다 멀리 가본 적 없는 정직한 신사가 존 맨더빌 경처럼 매혹적인 여행기를 쓰거나, 위대한 롤리처럼 과거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세계사 전체를 쓰면 잉크 묻은 손을 들어 경악할 것이다.
그들은 변명하려고 셰익스피어의 방패 뒤로 숨는다. 프로스페로를 마법사로 만들고 칼리반과 에어리얼을 하인으로 주었으며, 마법의 섬 산호초 주변에서 트리톤이 뿔피리를 불고 아테네 근처 숲에서 요정들이 서로 노래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 유령 왕들을 안개 낀 스코틀랜드 황야로 행진시키고 헤카테를 괴이한 자매들과 동굴에 숨긴 사람 말이다.
비평가는 늘 그렇듯 셰익스피어를 부르고 닳고 닳은 문장을 인용할 것이다. 예술이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불운한 격언은 햄릿이 예술에 관한 자기 광기를 구경꾼에게 확신시키려고 일부러 한 말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예술이 삶을 ‘재료’로 쓰는 것과 ‘방법’으로 쓰는 것은 다르다는 구분이 이 장의 핵심이다. 사용자 인터뷰와 로그는 재료다. 그 평균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제품이나 글이 되지는 않는다. 무엇을 고르고 어떤 순서와 규칙으로 다시 만드는지가 형식이다.
와일드의 동방 예술론과 미국 비판에는 당시 영국 지식인의 오만과 대상화가 섞여 있다. 그럼에도 모방보다 관습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명제는 남는다. 데이터 충실도를 이유로 설계의 책임을 모델이나 사용자에게 넘기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