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맑고 음악적인 목소리로 읽는다
“거짓말의 쇠퇴: 하나의 항의.
우리 시대 문학 대부분이 기묘할 만큼 평범해진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예술이자 과학이며 사교적 즐거움이던 거짓말이 쇠퇴했다는 사실이다.
고대의 역사가는 사실이라는 형식으로 즐거운 허구를 주었다. 현대의 소설가는 허구로 변장한 지루한 사실을 내놓는다. 정부 보고서가 방법과 문체 양쪽에서 빠르게 소설가의 이상이 되고 있다. 그는 따분한 ‘인간 문서’와 비참하게 작은 ‘창조의 한 귀퉁이’를 놓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국립도서관이나 대영박물관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료를 조사하는 그를 찾을 수 있다. 남의 생각을 빌릴 용기조차 없어 모든 것을 삶에서 직접 가져오겠다고 고집한다. 마침내 백과사전과 개인적 경험 사이에서 넘어지고 만다. 가족이나 매주 찾아오는 세탁부를 보고 인물을 만들며, 그 과정에서 얻은 유용한 정보를 아무리 깊이 사색하는 순간에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
우리 시대의 이런 그릇된 이상이 문학 전체에 끼친 손실은 아무리 크게 잡아도 지나치지 않다. 사람들은 ‘타고난 거짓말쟁이’를 말할 때 ‘타고난 시인’을 말하듯 부주의하다. 둘 다 틀렸다. 거짓말과 시는 하나의 예술이다. 핀토가 알아보았듯 둘은 무관하지 않다. 세심한 공부와 사심 없는 헌신이 필요하다.
회화와 조각 같은 물질적 예술에 형식과 색채의 미묘한 비밀, 장인만 아는 수수께끼, 숙고된 예술적 방법이 있듯 거짓말과 시에도 기술이 있다. 훌륭한 음악을 듣고 시인을 알아보듯, 풍부하고 리듬 있는 말을 듣고 거짓말쟁이를 알아볼 수 있다. 어느 쪽도 순간의 우연한 영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서도 완벽에 앞서 연습이 와야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시를 쓰는 유행이 지나치게 흔해져 가능하다면 말려야 할 정도인 반면, 거짓말을 하는 유행은 거의 불명예스러운 것이 되었다.
많은 젊은이가 천부적인 과장 능력을 지니고 인생을 시작한다. 잘 맞고 다정한 환경에서 키우거나 최고의 본보기를 흉내 내게 한다면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것으로 자랄 재능이다. 그러나 대개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부주의하게 정확해지는 습관에 빠지거나—”
시릴
이보게!
비비언
문장 한가운데 끼어들지 말게.
“부주의하게 정확해지는 습관에 빠지거나 나이 많고 박식한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기 시작한다. 둘 다 상상력에 똑같이 치명적이다. 누구의 상상력에든 그럴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실을 말하는 병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능력을 키운다. 자기 앞에서 나온 모든 말을 검증하기 시작하고, 자기보다 훨씬 젊은 사람의 말을 주저 없이 반박한다. 마침내 너무 현실적이라 누구도 그 개연성을 믿을 수 없는 소설을 쓰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수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사실을 향한 우리의 흉측한 숭배를 멈추거나 적어도 조절하지 못하면 예술은 메말라가고 이 땅에서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다.
섬세하고 환상적인 산문의 유쾌한 대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조차 이 현대적 악덕에 물들었다. 달리 부를 이름이 없다. 이야기를 지나치게 참되게 만들려다가 그 현실성을 빼앗는 일이 실제로 있다.
《검은 화살》에는 자랑할 만한 시대착오가 단 하나도 없을 만큼 비예술적이다. 지킬 박사의 변신은 의학지 《랜싯》에 실린 실험처럼 위험하게 읽힌다.
라이더 해거드는 한때는 장엄한 거짓말쟁이가 될 자질을 지녔다. 이제는 천재라는 의심을 받을까 너무 두려워 놀라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개인적 회상을 하나 지어내 각주에 넣는다. 겁쟁이 같은 확증인 셈이다.
다른 소설가들도 별로 낫지 않다. 헨리 제임스는 고통스러운 의무라도 수행하듯 소설을 쓴다. 단정한 문체와 절묘한 표현, 빠르고 신랄한 풍자를 하찮은 동기와 감지하기 어려운 ‘관점’에 낭비한다.
홀 케인은 거창함을 노리기는 한다. 하지만 늘 목청껏 쓴다. 너무 시끄러워 무슨 말을 하는지 견딜 수 없다.
제임스 페인은 찾을 가치가 없는 것을 숨기는 기술의 달인이다. 근시안적 탐정의 열정으로 명백한 것을 추적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의 초조함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윌리엄 블랙의 사륜마차를 끄는 말들은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지 않는다. 저녁 하늘을 놀라게 해 폭력적인 채색 석판 효과를 낼 뿐이다. 그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농부들은 사투리 속으로 피신한다.
올리펀트 부인은 보좌 신부와 잔디 테니스 파티, 가정생활 같은 지루한 것들을 두고 상냥하게 재잘거린다. 매리언 크로퍼드는 지방색의 제단에 자기를 제물로 바쳤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하늘’을 계속 이야기하는 프랑스 희극의 여자 같다.
게다가 도덕적 상투어를 말하는 나쁜 습관까지 들었다. 착한 것은 착한 것이며 나쁜 것은 사악한 것이라고 늘 알려준다. 때로는 거의 교화적이기까지 하다.
《로버트 엘스미어》는 물론 걸작이다. 영국인이 철저히 즐기는 유일한 문학 형식인 ‘지루함이라는 장르’의 걸작 말이다. 사려 깊은 젊은 친구가 진지한 비국교도 집안의 고기 곁들인 티타임에서 오가는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충분히 믿을 만하다.
실제로 그런 책은 영국에서만 나올 수 있다. 영국은 잃어버린 생각들의 고향이다. 태양이 늘 런던 동부에서 뜨는, 날마다 커지는 소설가 집단에 대해서는 이것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삶을 거칠게 발견하고, 날것 그대로 내버려 둔다.
사실만으로는 인물이 살아나지 않는다
프랑스도 《로버트 엘스미어》만큼 의도적으로 따분한 책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훨씬 낫지는 않다. 기 드 모파상은 날카롭고 신랄한 반어와 단단하고 생생한 문체로 삶에 남은 몇 조각의 누더기마저 벗긴다. 더럽고 아프고 곪은 상처를 보여준다. 모든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소름 끼치는 단편 비극, 눈물 때문에 웃을 수 없는 쓰디쓴 희극을 쓴다.
에밀 졸라는 문학에 관한 선언문에서 자기가 세운 고상한 원칙, ‘천재에게는 재치가 없다’에 충실하다. 천재가 없더라도 적어도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한다. 얼마나 성공적인가!
힘이 없는 작가는 아니다. 《제르미날》 같은 작품에는 때때로 거의 서사시적인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잘못됐다. 도덕적 근거가 아니라 예술적 근거에서 잘못됐다.
윤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히 그래야 할 모습이다. 저자는 완전히 진실하며 사물을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 묘사한다. 도덕주의자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우리는 졸라를 향한 당대의 도덕적 분노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가면이 벗겨졌을 때 타르튀프가 느끼는 분노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술의 관점에서 《목로주점》과 《나나》, 《살림》의 작가를 위해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러스킨은 조지 엘리엇 소설의 인물들이 펜턴빌을 달리는 합승마차 바닥에서 쓸어낸 먼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졸라의 인물들은 훨씬 나쁘다. 그들에게는 따분한 악덕과 더 따분한 미덕이 있다. 삶의 기록에는 흥미가 전혀 없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신경 쓰겠는가?
문학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품격, 매력, 아름다움, 상상력이다. 하층민이 하는 일을 기록한 글로 괴롭고 역겨운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알퐁스 도데는 더 낫다. 재치와 가벼운 손길, 재미있는 문체가 있다. 하지만 최근 문학적 자살을 저질렀다. 《나의 문학 생활 20년》을 통해 들로벨과 발마주르, 《잭》의 시인이 삶에서 직접 가져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안 뒤에는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갑자기 생명력과 애초에 지녔던 몇 안 되는 자질마저 모두 잃은 것처럼 보인다. 진짜로 살아 있는 사람은 존재한 적 없는 사람뿐이다. 소설가가 삶에서 인물을 가져올 만큼 비열하다면 적어도 창조한 인물인 척해야지 복제품이라고 자랑해서는 안 된다.
소설 속 인물을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인물과 같다는 사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작가답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은 예술 작품이 아니다.
심리소설의 대가 폴 부르제는 현대인의 남녀가 끝없는 장에 걸쳐 무한히 분석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오류를 범한다. 실제로 상류사회 사람에게 흥미로운 것은 각자가 쓰는 가면이지, 가면 뒤의 현실이 아니다. 부르제도 생제르맹 교외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런던에 올 때를 빼면 말이다.
굴욕적인 고백이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 폴스타프 안에는 햄릿이 있고, 햄릿 안에도 폴스타프가 적지 않다. 뚱뚱한 기사는 우울한 순간이 있고 젊은 왕자는 천박한 유머를 드러낼 때가 있다.
우리의 차이는 오직 우연한 것에 있다. 옷차림, 태도, 목소리, 종교적 견해, 외모, 습관 같은 것들이다. 사람을 분석하면 할수록 분석할 이유는 사라진다. 조만간 ‘인간 본성’이라는 끔찍하게 보편적인 것에 이른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듯 인류의 형제애는 시인의 꿈이 아니다. 대단히 우울하고 굴욕적인 현실이다. 작가가 상류층을 굳이 분석하려 한다면 성냥공장 소녀와 노점상을 곧바로 쓰는 편이 낫다.”
내가 여기서 자네를 더 붙들지는 않겠네. 현대 소설에 장점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해. 내가 고집하는 것은 한 가지야. 한 부류로 보자면 완전히 읽을 수 없다는 것.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이 장은 사실주의 비판인 동시에 당대 작가들을 향한 독설의 퍼레이드다. 계급적 경멸과 취향의 단정을 그대로 따라갈 이유는 없다. 중요한 질문은 “현실에서 가져왔는가”가 아니라 “가져온 현실을 새 형식으로 바꾸었는가”다.
생성형 AI는 기존 문장과 이미지의 확률적 평균을 아주 능숙하게 만든다. 자료 조사가 풍부하고 사실 오류가 없더라도 결과가 살아 있다는 보장은 없다. 유용한 정보를 모으는 단계와 그것을 한 사람의 관점·리듬·구조로 다시 만드는 단계를 분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