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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5 · 03

2부 전쟁과 노예제, 그리고 공모

오늘날 사람은 미국 정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내 대답은 이렇다. 불명예를 무릅쓰지 않고서는 그 정부와 한편이 될 수 없다. 노예의 정부이기도 한 정치 조직을 단 한순간도 나의 정부라고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크고 견딜 수 없을 때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할 권리 말이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이 보기에 1775년 혁명 때에는 그럴 만했다.

누군가 항구에 들어오는 일부 외국 상품에 세금을 매긴다는 이유로 이 정부가 나쁘다고 말한다면, 나는 아마 큰 소동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그 물건 없이 살면 그만이다. 모든 기계에는 마찰이 있고, 그 마찰이 악을 상쇄할 만큼 좋은 일을 할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만으로 큰 소동을 벌이는 일 역시 해악이다.

하지만 마찰을 위해 기계가 존재하고 억압과 강탈이 조직될 때, 그런 기계는 더 두지 말아야 한다. 자유의 피난처를 자처하는 나라에서 인구의 6분의 1이 노예이고, 한 나라 전체를 외국 군대가 부당하게 침략해 정복한 뒤 군정 아래 두었다면, 정직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혁명을 시작하기에 결코 이르지 않다. 더 다급한 까닭도 있다. 침략당한 나라가 우리가 사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한 군대가 바로 우리 군대이기 때문이다.

도덕 문제에서 많은 사람이 권위자로 여기는 윌리엄 페일리는 「시민 정부에 복종할 의무」라는 장에서 시민의 의무를 모두 편의의 문제로 돌린다. 그는 말한다.

“확립된 정부를 공공의 불편 없이 저항하거나 바꿀 수 없는 동안, 곧 사회 전체의 이익이 요구하는 동안에는 그 정부에 복종하는 것이 신의 뜻이며, 그보다 더 길지는 않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 원칙을 받아들이면 각각의 저항이 정당한지는 한쪽의 위험과 고충의 크기, 다른 쪽의 시정 가능성과 비용을 계산하는 문제로 바뀐다.”

그 계산은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고 페일리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편의라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 개인뿐 아니라 한 민족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를 실행해야 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물에 빠진 사람에게서 널빤지를 부당하게 빼앗았다면, 돌려주다가 내가 물에 빠지더라도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페일리 식으로 보면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자기 목숨만 건지려는 자는 도리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 나라는 한 민족으로서 존재를 잃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노예를 부리는 일과 멕시코에 전쟁을 벌이는 일을 멈춰야 한다.

실제로 국가들은 페일리의 말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에서 매사추세츠가 정확히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국가라는 매춘부, 은빛 옷을 입은 창녀여.
치맛자락은 받들게 하면서 영혼은 흙바닥에 끄는구나.”

현실적으로 매사추세츠의 개혁을 가로막는 사람은 남부의 정치인 십만 명이 아니다. 바로 이곳의 상인과 농부 십만 명이다. 그들은 인간성보다 상업과 농업에 더 관심이 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노예와 멕시코인에게 정의를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멀리 있는 적과 다투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과 협력하고 그들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과 다툰다. 이들이 없으면 먼 곳의 적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우리는 대중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진보가 느린 까닭은 소수가 다수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나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당신만큼 선해지는 것보다, 어딘가에 절대적인 선이 하나라도 존재하는 편이 중요하다. 그 선이 반죽 전체를 부풀릴 것이다.

노예제와 전쟁에 의견으로는 반대하면서 실제로 그것을 끝내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수천 명이다. 워싱턴과 프랭클린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면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앉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자유의 문제를 자유무역의 문제 뒤로 미룬다. 저녁을 먹은 뒤 시세표와 멕시코의 최신 소식을 조용히 읽다가 둘 다 펼쳐 놓은 채 잠들지도 모른다.

오늘 정직한 사람과 애국자의 시세는 얼마인가. 그들은 망설이고 후회하고 때로는 청원한다. 하지만 진지하고 효과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선의를 품은 채 다른 사람이 악을 고쳐 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더는 유감스러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옳음이 앞을 지나갈 때 값싼 한 표와 힘없는 호의, 잘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만 건넨다. 덕을 실제로 가진 한 사람 곁에는 덕의 후원자가 999명 있다. 그러나 어떤 물건은 임시로 맡아 둔 사람보다 진짜 주인을 상대하는 편이 쉽다.

모든 투표에는 도박의 성격이 있다. 체커나 백개먼 놀이에 도덕의 색을 살짝 칠한 것과 같다. 옳고 그름, 도덕 문제를 놓고 게임을 하면 자연히 내기도 따라온다. 하지만 유권자의 인격은 판돈에 걸리지 않는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옳음이 실제로 이기는 데 내 생사가 걸린 것은 아니다. 기꺼이 다수에게 맡겨 버린다. 그러므로 투표의 의무는 편의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옳은 쪽에 투표하는 것조차 옳음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이 이기기를 바란다고 다른 사람에게 희미하게 표현할 뿐이다. 현명한 사람은 옳음을 우연의 자비에 맡기지 않고, 다수의 힘으로 이기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 덩어리의 행동에는 덕이 거의 없다. 다수가 마침내 노예제 폐지에 표를 던질 때는 노예제에 무관심해졌거나, 표로 없앨 노예제가 거의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노예는 그들 자신뿐이다. 자기 표로 자기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만이 노예제 폐지를 앞당길 수 있다.

볼티모어나 다른 곳에서 대통령 후보를 고르는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들었다. 참석자는 주로 편집자와 직업 정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그들이 내리는 결정이 무슨 상관인가. 그래도 우리는 그의 지혜와 정직함에서 도움을 얻지 못하는가. 독립적인 표를 기대할 수는 없는가. 이 나라에는 전당대회에 가지 않는 개인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른바 존경받는 사람은 곧바로 자기 자리를 떠내려가 버리고 나라에 절망한다. 실은 나라가 그에게 절망할 이유가 더 많은데도 말이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뽑힌 후보 중 하나를 당선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라며 즉시 받아들인다. 그렇게 선동가가 어떤 목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입증한다. 그의 표는 돈으로 매수된 비양심적인 외국인이나 토박이 고용인의 표보다 나을 것이 없다.

아, 사람다운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 이웃의 표현대로라면, 손으로 뚫고 지나갈 수 없는 등뼈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의 통계가 잘못됐다. 인구가 너무 많게 집계됐다. 이 나라에는 천 제곱마일마다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한 명도 되지 않는다. 미국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할 만한 어떤 이유도 주지 못하는가.

미국인은 결국 친목회의 회원 같은 존재로 쪼그라들었다. 무리 짓는 기관만 발달하고 지성과 명랑한 자기 신뢰는 눈에 띄게 부족한 사람이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구빈원이 잘 수리됐는지 살피고, 아직 어른의 옷을 합법적으로 입기도 전에 훗날 생길 과부와 고아를 부양할 기금을 모은다. 한마디로 자신을 제대로 묻어 주겠다고 약속한 공제보험회사의 도움으로만 감히 살아간다.

사람이 아무리 거대한 악이라도 그것을 뿌리 뽑는 데 반드시 일생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일을 해도 정당하다. 그러나 최소한 그 악에서 손을 씻을 의무는 있다. 더는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더라도 실제 행동으로 지지해서는 안 된다. 내가 다른 일과 사색에 몰두하고 싶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앉아 그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에게도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우선 내려와야 한다.

얼마나 지독한 모순이 용인되는지 보라. 마을 사람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노예 반란을 진압하러 나가라거나 멕시코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려 보라고 해. 내가 가나 보자.”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이 충성을 바치고 돈을 냄으로써 직접 혹은 적어도 간접으로 자기 대신 갈 병사를 제공했다.

부당한 전쟁에 복무하기를 거부한 병사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 전쟁을 벌이는 부당한 정부를 지원하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 병사가 무시하고 부정하는 바로 그 행동과 권한의 주인들이 그를 칭찬한다. 마치 국가가 죄를 지으면서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자기를 채찍질하게 할 정도로는 뉘우쳤지만, 단 한순간 죄를 멈출 정도로는 뉘우치지 않은 꼴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질서’와 ‘시민 정부’라는 이름 아래 결국 자기 비열함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떠받치게 된다. 죄를 처음 짓고 얼굴을 붉히던 시간이 지나면 무관심이 찾아온다. 부도덕했던 일은 마치 도덕과 상관없는 일이 되고, 우리가 만든 삶을 유지하는 데 완전히 불필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굳어진다.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흔한 잘못일수록 가장 사심 없는 덕이 그것을 떠받쳐야 한다. 애국이라는 덕목에 흔히 따라붙는 가벼운 비난은 고귀한 사람이 가장 받기 쉽다. 정부의 성격과 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충성과 지원을 바치는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정부의 가장 양심적인 지지자다. 그래서 개혁을 가장 심각하게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주정부에 연방과의 결합을 끊고 대통령의 요구를 따르지 말라고 청원한다. 왜 그들 자신은 자기와 주정부 사이의 결합을 끊고, 주정부 금고에 자기 몫의 돈을 내기를 거부하지 않는가. 그들과 주정부의 관계는 주정부와 연방의 관계와 같지 않은가. 주정부가 연방에 저항하지 못하게 한 이유가 그들이 주정부에 저항하지 못하게 한 이유와 같지 않은가.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반대 의견과 비용 부담

회의에서 반대하고도 출시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 사람은 무엇을 했는가. 소로는 말과 표명이 아니라 실제 지원의 중단을 묻는다. 윤리 원칙을 발표하면서 매출 목표와 인사평가가 반대 행동을 처벌한다면 조직은 구성원의 양심을 홍보 문구로만 쓴다.

그렇다고 모든 이견이 즉각적인 퇴사나 제품 중단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잘못의 크기, 피해의 긴급성, 내부 시정 가능성, 행동이 타인에게 떠넘기는 위험을 따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나는 반대했다”에서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결정권, 돈, 코드, 서명, 침묵 가운데 내가 실제로 무엇을 제공하는지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