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생각 이전의 층위, 순수한 감각 지각의 층위로 내려갔을 때 얻는 강렬한 흥미를 정말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게 묘사했다.
W. H. 허드슨의 《파타고니아의 한가한 나날》이다.
어느 겨울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70~80마일 떨어진 리오네그로강의 한 지점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 총을 들고 말에 오르는 것이 습관이었다. 개 한 마리가 뒤따랐고 나는 골짜기를 떠났다.
높은 평지에 올라 온 세상을 덮은 회색 덤불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골짜기와 강에서 5마일이 아니라 500마일 떨어진 듯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끝없이 뻗은 회색 황무지는 거칠고 외롭고 멀었다. 사람이 밟지 않았고, 야생동물도 너무 드물어 가시덤불 속에 알아볼 만한 길조차 내지 못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을 한두 번 찾아간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이 고독으로 돌아갔다. 아침이면 축제에 참석하듯 찾아갔고, 굶주림과 갈증과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떠나라고 할 때에야 나왔다.
그런데 가는 목적도, 말로 설명할 동기도 없었다. 총을 들었지만 쏠 것은 없었다. 사냥감은 골짜기에 두고 온 셈이었다.
때로는 하루 종일 포유동물 한 마리 보지 못했고, 몸집 있는 새도 열두 마리 이상 보지 못했다.
날씨는 음울했다. 하늘에는 대개 회색 구름 막이 퍼졌고, 말고삐를 잡은 손이 저릴 만큼 차가운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느린 속도로 몇 시간씩 말을 탔다. 언덕에 닿으면 천천히 정상에 올라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사방으로 야생의 불규칙한 굴곡이 펼쳐졌다. 모든 것이 얼마나 회색이었는가. 가까운 곳도 안개에 싸인 수평선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먼 언덕은 흐릿하고 윤곽은 거리에 가려졌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목적 없는 방랑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높은 곳을 찾아 같은 풍경을 다른 지점에서 보았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했다.
정오가 되면 말에서 내려 접은 판초 위에 한 시간 넘게 앉거나 누웠다.
생각보다 먼저 만들어진 자리
어느 날 돌아다니다 스무 그루나 서른 그루의 나무가 알맞은 간격으로 자란 작은 숲을 발견했다. 사슴이나 다른 야생동물 무리가 드나들던 곳이 분명했다.
그 숲이 있는 언덕은 이웃 언덕과 생김새가 달랐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매일 정오 그곳을 찾아 쉬었다.
다른 언덕의 수백만 나무와 덤불 아래 두고 왜 멀리 돌아가면서까지 바로 그곳을 골랐는지 자신에게 묻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했다.
나중에야 까닭을 짐작했다. 한 번 그곳에서 쉰 뒤 다시 쉬고 싶을 때마다 매끈한 줄기와 깨끗한 모래 바닥을 가진 그 나무 무리의 이미지가 욕구와 결합했다. 곧 동물처럼 같은 자리로 돌아가 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이어서 썼다.
앉아서 쉬었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피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곤하지 않은 채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정오의 멈춤은 이상하리만큼 만족스러웠다.
하루 종일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어느 날 침묵을 듣다가 소리를 질러 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거의 몸서리가 날 만큼 끔찍한 제안으로 느껴졌다.
그 고독한 나날에는 어떤 생각이 정신을 지나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기다리며 깨어 있었다. 하지만 모험을 기대하지 않았고, 지금 런던의 방 안에 앉아 있는 것만큼 두려움도 없었다.
그 상태는 낯설기보다 익숙했고 강한 고양감이 따랐다. 예전의 나, 생각과 낡고 무미건조한 삶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무언가가 나와 지성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이 분명 뒤로 돌아갔다고 보았다. 높은 지적 기능이 멈춘 채 강렬하게 경계하고 깨어 있는 상태는 순수한 자연인의 정신 상태를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거의 생각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더 확실한 안내자인 감각 지각을 따른다. 자연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자신이 사냥하는 동물과 자신을 사냥하기도 하는 동물에 정신적으로 가까워진다.
이 설명에는 인간 문화와 지성을 일직선 위에 놓은 당대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허드슨이 기록한 감각의 생생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시간
관찰자에게 허드슨이 묘사한 시간은 공허한 이야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얻는 것도 없으며 묘사할 것도 없다. 무의미하고 빈 시간의 덩어리다.
그러나 그 내면의 비밀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말로 증명할 수 없지만 스스로를 보증하는 중요성이 전율한다.
이 신비로운 감각의 삶이 거는 주문에 한 번도 닿지 않은 소년과 소녀, 남성과 여성이 안타깝다. 그것을 비합리적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하지만 거기에는 깨어 있음과 최고의 행복이 있다.
삶의 휴일은 가장 생생하게 중요한 부분이다. 바로 이런 마법처럼 무책임한 주문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손을 떼라
이 모든 생각과 인용에서 어떤 결론을 얻는가.
한편으로는 부정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이다.
우리와 다른 존재 방식이 무의미하다고 성급하게 선언하는 일을 절대 금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관심과 행복을 누린다면, 그 방식이 아무리 이해되지 않더라도 관용하고 존중하며 누리도록 두라고 명한다.
손을 떼라.
진실 전체와 선 전체는 어떤 한 명의 관찰자에게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관찰자는 각자 자신이 선 특수한 위치에서 부분적으로 더 잘 보는 것을 얻는다.
감옥과 병실에도 그곳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이 사는 이 광대한 영역 전체를 통제하려 들지 말라. 우리 각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에 충실하고, 자신이 받은 좋은 것을 최대한 살리면 충분하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관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체류 시간, 전환율, 산출물로 잡히지 않는 경험에도 당사자에게만 드러나는 중요성이 있다.
제품과 조직의 권력은 타인의 방식을 ‘비효율’로 판정하고 곧바로 고칠 수 있게 한다. 제임스의 결론은 무관심이 아니라 절제다. 해를 주지 않는 낯선 행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제거하지 말라. 하나의 지표와 하나의 관찰 위치에 진실 전체가 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