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든 작든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물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어떤 사물을 떠올린 관념 때문에 그것을 소중하다고 판단할 때에도, 그 관념 자체가 이미 감정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감정이 전혀 없고 정신이 관념만 품을 수 있다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은 단번에 사라진다. 삶의 어느 상황이나 경험이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없게 된다.
이 글에서 말하려는 인간의 눈멂은 자신과 다른 생명과 사람의 감정을 보지 못하는 눈멂이다. 우리 모두가 이 병을 앓는다.
우리는 저마다 제한된 역할과 의무를 수행하는 실천적 존재다. 누구나 자기 의무의 중요성과 그 의무를 불러내는 상황의 의미를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감정은 각자의 생생한 비밀이다. 다른 사람이 공감해 주기를 바라지만 대개 헛된 기대다. 그들도 자기만의 생생한 비밀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 우리의 비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낯선 삶의 의미를 말할 때 우리 의견이 어리석고 부당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다른 사람이 처한 조건이나 품은 이상을 절대적으로 평가하려 할 때 우리 판단이 거짓이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와 인간은 서로의 기쁨을 모른다
개와 인간을 보라. 이 세상의 대부분 관계보다 더 가까운 끈으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도 서로를 향한 다정함을 벗어나면, 상대의 삶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들에 얼마나 무감각한가.
우리는 울타리 밑의 뼈와 나무·가로등 냄새가 주는 황홀함을 모른다. 개는 문학과 예술이 주는 기쁨을 모른다.
당신이 지금까지 만난 가장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앉아 있을 때, 폭스테리어는 당신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할까. 아무리 선의를 품어도 개는 그 행동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산책을 나가 막대기를 던져 줄 수도 있는데 감각 없는 조각상처럼 앉아 있다니. 물건을 손에 들고 몇 시간씩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고 의식적인 삶마저 텅 빈 듯 보이는 이 기묘한 병은 왜 날마다 찾아오는가.
한 미국인 여행자가 아프리카 내륙에서 우연히 《뉴욕 커머셜 애드버타이저》 한 부를 얻어 한 칸씩 탐독했다. 그 모습을 둘러서 지켜보던 현지 사람들은 진실에 조금 더 가까이 갔지만 역시 놓쳤다. 여행자가 다 읽고 나자 그들은 그 수수께끼 같은 물건에 큰돈을 내겠다고 했다.
왜 갖고 싶으냐고 묻자 “눈에 쓰는 약으로”라고 답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종이 표면에 눈을 담가 두는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그들에게는 그것뿐이었다.
관찰자의 판단은 사태의 뿌리를 놓칠 수밖에 없다. 평가받는 당사자는 판단하는 관찰자가 보지 못하는 현실의 일부를 안다. 당사자가 더 알고 관찰자는 덜 안다.
의견이 충돌하고 보는 방식이 다를 때, 더 진실한 쪽은 덜 느끼는 쪽이 아니라 더 많이 느끼는 쪽이라고 믿어야 한다.
황폐한 땅에서 승리를 본 사람들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일어나는 일을 개인적인 사례로 들어 보겠다.
몇 해 전 노스캐롤라이나 산악 지대를 여행하며 그곳 사람들이 ‘코브’라고 부르는 곳을 많이 지나쳤다. 언덕 사이에 들어간 작은 골짜기의 윗부분을 새로 개간하고 작물을 심은 땅이었다.
내 눈에는 더없이 누추해 보였다. 정착민들은 다루기 쉬운 나무를 베고 불탄 그루터기를 남겨 두었다. 큰 나무에는 둘레를 따라 껍질을 벗겨 죽였다. 잎이 그늘을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다음 통나무집을 짓고 틈을 진흙으로 메웠다. 돼지와 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파괴의 현장 둘레에 키 큰 지그재그 울타리를 둘렀다. 끝으로 그루터기와 나무 사이에 옥수수를 불규칙하게 심었다. 옥수수는 나뭇조각 사이에서 자랐다.
그들은 아내와 어린아이들과 그곳에서 살았다. 도끼와 총, 몇 가지 도구, 숲에서 먹이를 찾는 돼지와 닭 몇 마리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숲은 파괴됐다. 숲을 없애고 이루었다는 ‘개선’은 흉측한 상처 같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잃은 자리를 메울 인공적인 우아함은 하나도 없었다.
그 정착민의 삶은 정말 추해 보였다. 뱃사람의 표현대로 돛대만 세운 채 달리는 배처럼 맨몸으로 버텼다. 최초의 조상이 출발한 곳까지 되돌아가 다시 시작하면서, 그사이 여러 세대가 이룬 성취의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다.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나는 황량함에 짓눌린 채 마차에서 생각했다. 노년과 아이들을 위해 시골에서 산다고?
맨땅과 맨손만으로 싸워야 하는 이런 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문명이 거둔 가장 좋은 전리품을 삶에 엮어 넣지 않은 방식은 안 됐다. 여러 세기가 얻은 아름다움과 편의는 소중하다. 우리의 유산이며 타고난 권리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도 이렇게 원시적이고 벌거벗은 상태로 단 하루도 살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마차를 몰던 산악 주민에게 물었다.
“새로 이런 땅을 개간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가 대답했다.
“우리 모두죠. 여기서는 코브 하나를 경작지로 만들고 있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아요.”
그 순간 나는 상황의 내적 의미 전체를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간지가 내게 황폐함만 말했기 때문에, 튼튼한 팔과 말을 잘 듣는 도끼로 그 땅을 만든 사람에게도 다른 이야기는 해 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흉측한 그루터기를 볼 때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승리였다. 나뭇조각과 껍질을 벗긴 나무, 볼품없는 쪼갠 나무 울타리는 정직한 땀과 끈질긴 노동, 마지막 보상을 말해 주었다. 통나무집은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증서였다.
내 망막에 찍힌 개간지는 추한 그림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도덕적 기억이 향기처럼 배어 있는 상징이었고, 의무와 투쟁과 성공을 기리는 찬가였다.
그들이 케임브리지의 실내에 틀어박힌 내 기묘한 학자 생활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이상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그들의 조건이 품은 고유한 이상을 똑같이 보지 못했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대시보드에서 보이는 행동은 외부의 흔적일 뿐이다. 사용자가 왜 낡은 우회로를 고집하는지, 팀원이 왜 사소해 보이는 업무에 자부심을 느끼는지는 그 행동을 안에서 살아 본 사람만 안다.
관찰은 필요하지만 관찰자의 해석이 곧 진실은 아니다. 고객을 ‘비합리적’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 행동이 지키는 안전, 승리, 소속의 기억을 물어야 한다. 더 많이 느끼는 당사자가 알고 있는 현실을 제품팀의 문서가 놓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