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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26 · 04

3부 보이지 않던 의미가 갑자기 열리는 순간

그전까지 죽은 외부 모습으로만 알던 것에서 내적 의미를 보는 높은 시야는 흔히 갑자기 찾아온다. 한번 찾아오면 그 사람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연다.

에머슨의 말처럼 그런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경험보다 더 많은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사랑의 열정은 폭발처럼 사람을 뒤흔든다. 어떤 행동이 뉘우침을 깨우면 그 감정은 이후의 모든 날 위에 구름처럼 걸린다.

숨은 의미를 느끼는 이 신비로운 감각은 인간 아닌 자연에서 자주 불쑥 나타난다.

한때 인기를 얻은 프랑스 소설 《오베르만》의 한 대목을 보자.

파리, 3월 7일. 어둡고 조금 추웠다. 나는 우울했고 할 일이 없어 걸었다. 가슴 높이의 담 위에 놓인 꽃 몇 송이를 지나쳤다.

꽃이 핀 수선화가 있었다. 욕망을 가장 강하게 표현하는 꽃이었다. 그해 처음 맡은 향기였다.

나는 인간에게 예정된 모든 행복을 느꼈다. 말로 할 수 없는 영혼들의 조화, 이상 세계의 환영이 완전한 모습으로 내 안에 솟아났다. 그렇게 크고 그렇게 순식간인 것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어떤 형태, 어떤 닮음, 어떤 비밀스러운 관계가 그 꽃에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이 힘과 광대함,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이 형상, 느낄 수는 있지만 자연이 만들지는 않은 듯한 더 나은 세계의 이상을 나는 결코 하나의 개념 안에 가둘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진짜 소식

워즈워스와 셸리도 자연물 안의 끝없는 의미를 느끼는 감각으로 가득했다. 워즈워스에게 그것은 다소 엄격하고 도덕적인 의미, ‘외로운 기쁨’이었다.

모든 자연의 형상, 바위와 열매와 꽃에
길 위에 흩어진 돌에까지
나는 도덕적 생명을 주었다. 그들이 느끼는 것을 보거나
어떤 감정과 이어 놓았다. 거대한 덩어리는
생명을 깨우는 영혼 안에 놓였고
내가 본 모든 것은 내적 의미로 숨 쉬었다.

“보이지 않는 것의 진짜 소식!”

워즈워스가 그토록 황홀하게 느끼고, 그 빛 속에서 며칠씩 언덕을 걸으며 살았던 자연의 숨은 존재가 무엇인지는 시인 자신도 논리나 분명한 개념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비슷한 빛의 순간을 겪은 독자에게 그 사실을 그대로 선언하는 그의 시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권위를 지닌다.

장엄하게
아침이 잊지 못할 위엄 속에 솟았다.
내가 본 어느 때보다 찬란했다.
앞에서는 먼 바다가 웃었고, 가까이서는
단단한 산들이 구름처럼 빛났다.
곡물 빛을 머금고 천상의 빛에 젖었다.
풀밭과 낮은 땅에는 평범한 새벽의
온갖 달콤함이 있었다. 이슬과 안개,
새들의 노래, 밭을 갈러 나가는 일꾼들.

그는 이어서 썼다.

아, 친구여. 말해야 할까.
내 마음은 가장자리까지 가득했다.
나는 서약하지 않았지만 서약이 나를 위해 이루어졌다.
내가 알지 못한 결속이 주어졌다.
헌신하는 영혼이 되지 않는다면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나는 계속 걸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감사의 축복 속에서.

이 기묘한 내적 기쁨으로 가득 차 주변 자연의 비밀스러운 삶에 응답하며 워즈워스가 걸을 때, 자기 일과 작물과 어린 양과 울타리에만 단단히 매인 시골 이웃들은 그를 하찮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에 어떤 가치가 있을지 궁금해한 사람은 분명 없었다.

하지만 그 내면의 삶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먹여 살릴 만큼 큰 의미를 품었다. 오늘까지도 사람들의 내면을 기쁨으로 채운다.

밖에서는 쉬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리처드 제프리스는 《내 마음의 이야기》라는 놀라운 자전적 기록을 남겼다. 젊은 시절 자연의 생명을 느끼며 얻은 황홀함을 여러 쪽에 걸쳐 기록한 책이다. 그는 어느 언덕 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태양과 땅과 완전히 홀로 있었다. 풀 위에 누워 땅과 태양과 공기, 보이지 않을 만큼 먼 바다에 영혼으로 말을 걸었다.

나를 들어 올린 감정의 온 힘으로, 땅과 태양과 하늘, 빛에 가려진 별들과 바다에 느낀 강렬한 교감으로 기도했다. 이 감정의 전율하는 깊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쓸 수 없다. 그것들을 악기의 건반 삼아 기도했다.

빛으로 타오르는 거대한 태양, 강한 땅, 사랑하는 땅, 따뜻한 하늘과 맑은 공기, 바다에 대한 생각, 모든 것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나를 환희와 황홀경과 영감으로 채웠다.

기도, 이 영혼의 감정은 어떤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열정이었다. 나는 풀에 얼굴을 묻었다. 완전히 엎드려 싸움 속에서 자신을 잃고 황홀함에 휩쓸려 갔다.

양치기가 우연히 풀밭에 누운 나를 보았다면 몇 분 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안에서 열정의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통상적인 상업 가치로 재면 분명 쓸모없는 한 시간이다.

그러나 어떤 기준으로든 한 시간을 소중하게 만드는 가치가 그 시간의 내용이 누군가에게 일으킨 이런 벅찬 의미의 감정이 아니라면, 대체 다른 어떤 종류의 가치일 수 있는가.

그런데도 실질적 이해관계의 소음은 우리를 나머지 모든 것에 눈멀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인간을 넘어선 가치의 세계를 넓게 보고 삶의 의미를 더 크고 객관적인 규모에서 느끼려면 실용적 인간으로서 쓸모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신비주의자, 몽상가, 돈 없는 떠돌이와 한량만이 그런 공감의 일에 시간을 쓸 수 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통상적인 인간 가치의 기준을 바꾼다. 어리석음을 권력보다 높은 자리에 놓고, 성실하고 관습적인 사람이 평생 쌓은 구별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그렇게 살면 예언자는 될지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기는 어렵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측정되지 않는 시간이 곧 낭비인 것은 아니다. 아무 산출물도 남기지 않은 산책, 대화, 관찰이 한 사람의 가치 척도를 바꾸고 이후의 모든 판단을 새로 배열할 수 있다.

문제는 모든 비생산적 시간을 미화하는 것도, 모든 시간을 상업 가치로 환산하는 것도 아니다. 밖에서 보이는 활동량만으로 그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의미를 단정할 수 없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