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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26 · 03

2부 기쁨을 놓치면 전부를 놓친다

삶의 어떤 과정이 그것을 사는 사람에게 열의를 불어넣는다면, 그 삶은 진정한 의미를 얻는다.

열의는 때로 몸의 활동과 더 단단히 묶이고, 때로 지각이나 상상, 사색과 묶인다. 어디에서 생기든 그곳에는 맛과 전율, 현실의 흥분이 있다. ‘중요함’이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상상의 세계에서 가져온 한 사례로 이 사실을 보여 주었다. 내용의 진실과 형식의 탁월함을 생각하면 영원히 남아야 할 글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랜턴을 품은 소년들

스티븐슨은 썼다.

9월 말이 되어 개학이 가까워지고 밤이 벌써 어두워지면, 우리는 각자의 별장에서 주석으로 만든 둥근 렌즈 랜턴을 하나씩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유명한 물건이라 영국 상업계에 아예 길이 날 정도였다. 때가 되면 식료품상들은 우리가 쓰는 바로 그 랜턴으로 진열장을 꾸몄다.

우리는 랜턴을 크리켓 허리띠에 매달고 그 위로 외투 단추를 잠갔다. 그것이 이 놀이의 엄격한 규칙이었다. 랜턴에서는 달아오른 주석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불은 제대로 타는 법이 없었지만 손가락만큼은 늘 태웠다.

아무 쓸모도 없고 즐거움은 순전히 상상에서 나왔다. 그런데도 외투 밑에 랜턴을 품은 소년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배에서 랜턴을 썼다. 아마 거기서 힌트를 얻었겠지만 그들의 랜턴은 우리 것과 달랐고, 우리는 어부인 척한 적도 없었다. 경찰은 허리띠에 랜턴을 달았고 우리는 분명 그 모습을 따라 했지만 경찰 놀이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도둑을 희미하게 떠올렸을 것이다. 랜턴이 더 흔했던 옛 시대와 랜턴이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이야기책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합쳐 보아도 즐거움은 그 자체로 완전했다. 외투 밑에 랜턴을 지닌 소년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랜턴을 지닌 소년들이 만나는 장면을 이어서 말한다.

이 바보 둘이 만나면 한 명이 불안한 목소리로 “랜턴 가져왔어?”라고 묻고, 다른 한 명은 흐뭇하게 “응!”이라고 답했다. 그것이 우리끼리 통하는 암호였다.

영광을 숨겨 두는 것이 규칙이어서, 스컹크처럼 냄새를 맡지 않고서는 누가 랜턴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다. 네댓 명이 열 사람이 타는 작은 고깃배 밑바닥에 기어들어 갈 때도 있었다. 선실은 대개 잠겨 있어 머리 위에는 가로대밖에 없었다. 아니면 머리 위로 바람이 휘파람 부는 모래언덕의 움푹한 곳을 골랐다.

외투 단추를 풀고 랜턴을 드러냈다. 바람 부는 거대한 밤의 전당 아래 얼룩덜룩 흔들리는 빛 속에서, 달궈진 주석이 풍기는 짙은 김에 격려받으며, 이 운 좋은 젊은 신사들은 차가운 모래나 고깃배의 비늘 묻은 바닥에 웅크려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로 즐거워했다.

그 말들을 조금이라도 소개할 수 없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대화는 양념에 불과했고 모임 자체도 랜턴을 지닌 사람의 경력에서 우연한 사건일 뿐이었다.

행복의 핵심은 칠흑 같은 밤을 혼자 걷는 데 있었다. 덮개를 닫고 외투 단추를 채워, 발걸음을 비추지도 영광을 세상에 알리지도 못하게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게 했다. 어둠 속의 어두운 기둥이 되어 걸었다.

그러는 동안 어리석은 마음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는 허리에 랜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앎에 환호하고 노래했다.

소년의 상상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았다.

가장 무딘 사람의 가슴에서도 시인은 일찍 죽는다고들 한다. 오히려 거의 모든 사람 안에 작은 음유시인 하나가 살아남아 주인에게 삶의 향신료가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인간의 상상이 지닌 변화무쌍함과 바닥 모를 유치함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다. 밖에서 보면 그의 삶은 거친 진흙더미에 불과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심에는 그가 기쁨에 차서 사는 황금 방이 있다. 관찰자의 눈에 길이 아무리 어두워 보여도 그의 허리에는 어떤 랜턴이 매달려 있다.

스티븐슨은 숲에서 새의 노래를 잠시 듣고 돌아왔더니 수도원 문 앞에서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린 수도승의 우화를 꺼낸다. 그사이 50년이 흘러 동료 가운데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한 명만 남았다.

이 마법의 새는 숲에서만 노래하지 않는다. 아마 그곳에서 태어났겠지만 가장 음울한 곳에서도 노래한다. 구두쇠가 그 소리를 듣고 낄낄 웃으면 그의 나날은 순간처럼 흐른다. 나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랜턴 하나로 헐벗은 모래언덕에서 그 새를 불러냈다.

순전히 기계적이지 않은 삶은 두 가닥 실로 짜인다. 그 새를 찾는 일과 그 노래를 듣는 일이다.

그래서 삶의 가치를 판단하기가 그토록 어렵고, 각자의 기쁨은 전달하기가 그토록 어렵다. 그 새가 우리를 위해 노래했던 운 좋은 시간을 기억하기 때문에 사실주의자의 책을 펼칠 때 놀라게 된다.

그곳에는 진흙과 낡은 쇠, 값싼 욕망과 값싼 두려움, 기억하기 부끄러운 것과 잊어도 상관없는 것으로 이루어진 삶의 그림이 있다. 그러나 시간을 삼키는 나이팅게일의 음은 들리지 않는다.

소년들을 외부에서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있다. 춥고 비를 맞았으며 쓸쓸한 곳에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실제로 어리석고 상스러웠다. 관찰자의 눈에 그들은 젖고 춥고 황량하게 둘러싸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으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랜턴 때문에 비밀스러운 기쁨의 천국에 있었다.

사람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좀처럼 맞히기 어렵다. 랜턴 같은 부속물 하나에 달려 있을 수도 있고, 심리의 수수께끼 같은 내부에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외부와 거의 연결되지 않아 아예 닿지 않을 때도 있다. 그가 살기를 받아들이게 하는 진짜 삶은 온전히 상상의 들판에 놓일 수 있다.

그런 경우 시는 지하로 흐른다. 문서를 손에 든 불쌍한 관찰자는 완전히 길을 잃는다. 사람을 겉에서 보는 것은 속기를 자청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가 영양을 얻는 나무줄기는 보지만, 정작 그는 그 위 멀리 푸른 잎의 둥근 지붕 속에 있다. 바람이 웅웅 울고 나이팅게일이 둥지를 튼 곳이다.

진정한 사실주의자는 시인처럼 다람쥐가 되어 그를 따라 올라가 그가 사는 천국을 조금이라도 보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진정한 사실주의는 시인의 일이다. 기쁨이 사는 곳을 찾아 노래보다 더 멀리 닿는 목소리를 주는 일이다.

그의 결론은 단호하다.

기쁨을 놓치면 전부를 놓친다. 행동의 의미는 행동하는 사람의 기쁨 안에 있다. 그것이 설명이고 변명이다.

랜턴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에게 모래언덕의 장면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사실주의 책에는 유령 같은 비현실성이 따라다닌다.

거기에는 개인의 시, 마법에 걸린 공기, 벌거벗은 것에 옷을 입히고 비천해 보이는 것을 고귀하게 만드는 무지개 같은 상상의 작업이 빠져 있다. 삶은 석양의 빛깔 속으로 풍선처럼 날아오르지 못하고 반죽처럼 죽어 쓰러진다.

모든 묘사는 참이지만 모든 삶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소금과 산으로 이루어진 외부의 진실 속에서 살지 않는다. 색칠한 창문과 이야기로 덮인 벽을 가진, 따뜻하고 환상적인 뇌의 방 안에서 산다.

이 인용은 스티븐슨의 모든 글 가운데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대목이다.

“기쁨을 놓치면 전부를 놓친다.” 정말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유한하고 저마다 전문화된 소명이 하나씩 있다. 그 의무에 온 힘을 쓰려면 다른 모든 것에 마음을 굳게 닫아야 하는 듯 보인다. 실천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한 종류의 기쁨을 제외한 나머지에 무감각해지는 값을 치러야 하는지도 모른다.

불쌍한 몽상가, 철학자, 시인, 이야기꾼에게서만, 또는 평범한 실무자가 사랑에 빠질 때만 단단한 외피가 무너진다. 그러면 외부 모습과 전혀 다른, 우리 너머의 거대한 내면 세계를 엿보는 빛이 정신을 비춘다.

평소의 가치 체계 전체가 뒤섞인다. 자아가 갈라지고 좁은 이해관계는 산산조각 난다. 새로운 중심과 새로운 관점을 찾아야 한다.

내 동료 조사이어 로이스는 그 변화를 훌륭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대는 그의 생각과 감정이 자신의 것과 어떻게든 다르다고 여겼다. “그가 느끼는 고통은 내가 느끼는 고통과 같지 않다. 훨씬 견디기 쉬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대보다 조금 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삶은 흐리고 차가우며, 그대의 불타는 욕망 옆에 놓인 창백한 불이었다.

그대는 눈먼 채 본능과 희미한 감각만으로 이웃과 살았고 그를 알지 못했다. 그를 물건으로 만들고 자아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이 환상을 끝내고 진실을 배우려 하라. 고통은 어디서나 그대 안에서처럼 고통이고, 기쁨은 어디서나 기쁨이다.

숲의 모든 새 노래에서, 붙잡힌 자의 힘 아래 몸부림치는 상처 입고 죽어 가는 생명의 모든 울음에서, 무수한 물속 생명이 다투고 죽는 끝없는 바다에서, 셀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질병과 슬픔에서, 모든 환희와 희망에서 같은 의식적이고 불타며 의지를 지닌 삶을 만난다.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고귀한 곳까지 그 삶은 생명의 형상만큼 끝없이 다양하고, 태양의 불처럼 꺼지지 않으며, 지금 그대의 작고 이기적인 가슴에서 뛰는 충동만큼 현실적이다.

눈을 들어 그 삶을 보라. 그런 다음 할 수 있다면 돌아서서 잊어라.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대는 자신의 의무를 알기 시작한 것이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정성 인터뷰의 목표는 사용자의 말을 기능 요구사항으로 압축하는 데만 있지 않다. 그 사람이 무엇을 잃고 싶지 않은지, 남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어떤 ‘랜턴’을 품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이다.

행동 로그와 녹취록은 나무줄기를 보여 준다. 사용자가 사는 푸른 지붕까지 보려면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 기쁨을 놓친 제품 설명은 사실을 모두 기록하고도 삶의 이유를 전부 놓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