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이 단어를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는가.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이상은 먼저 지적으로 생각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지녔다면 자신도 모르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지적 사실에 따르는 시야의 확장과 고양감, 밝음을 함께 가져야 한다.
둘째, 이상에는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그 이상에 붙잡힌 사람에게는 새로워야 한다.
눅눅하게 굳은 반복은 이상과 양립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낡은 반복인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새로움일 수 있다.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상은 그것을 품은 삶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에게는 도랑에 빠지지 않고 사는 일이 의식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형제자매에게는 가장 정당하게 온 정신을 쏟을 이상이다.
이상만으로는 가장 값싼 것이 된다
벌거벗은 추상으로 당장 떼어 놓고 보면 이상 자체는 삶에서 가장 값싼 것이다.
누구나 개인적이거나 보편적이고, 올바르거나 잘못됐고, 낮거나 높은 형태로 이상을 지닌다.
조금의 노력과 용기와 인내도 보이지 않는 무가치한 감상가와 몽상가, 술꾼과 게으름뱅이와 시 짓는 사람이 어쩌면 가장 많은 이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교육은 수평선과 관점을 넓혀 이상을 늘리고 새로운 이상을 시야에 들이는 수단이다.
그렇다면 이상을 많이 보유하는 것만으로 삶이 의미 있어진다고 할 때, 빳빳한 셔츠와 안경을 쓴 대학 교수가 가장 절대적이고 깊게 의미 있는 인간이 된다.
톨스토이가 그를 점잔 빼는 사람, 현학자, 우스운 모조품이라고 경멸했다면 완전히 눈먼 셈이 된다. 육체노동의 신성함에 관해 우리가 새로 얻은 통찰도 진실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런 결과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한 사람이 이상을 많이 갖고도 거기서 끝난다면 오히려 더 경멸스럽게 여긴다. 노동자의 미덕이 하나도 행동으로 불려 나오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려 용기를 보이거나 결핍을 견디거나 때와 흉터를 얻지 않았다면 그렇다.
관찰자의 감탄까지 요구할 의미를 삶이 얻으려면 이상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이상과 함께 내적 기쁨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감상적인 일이다.
자기 이상을 돌보기에도 바쁜 외부인에게 마지못한 인정이라도 받아 내고 싶다면, 이상적인 시야를 노동자가 가진 더 단단한 미덕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감정의 평면에 행동하는 의지라는 차원을 곱해야 한다. 그래야 깊이가 생기고 성격이 입체적이고 단단한 것이 된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결실이 없다
소통할 수 있고 공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간 삶의 의미는 서로 다른 두 부모가 결혼해 낳은 자식이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결실이 없다.
이상만으로는 현실성이 없고, 미덕만으로는 새로움이 없다.
비관주의자가 무엇을 말하든 삶에서 가장 깊은 의미, 적어도 비교적 가장 깊은 의미는 진전이라는 성격에 있는 듯하다. 매 순간 현실과 이상적인 새로움이 결합하는 기묘한 상태다.
이상적인 새로움을 알아보는 일은 지성의 과제다. 모든 사람의 지성이 어떤 새로움이 이상적인지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상적인 것은 여전히 오래되고 익숙한 좋은 것에 붙어 있을 것이다.
그 경우 그 성격은 전체로서 의미 있지 않더라도 애틋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인간 성격에서 싸우는 미덕과 지적 폭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본질적인지 골라야 한다면 톨스토이 편에 서야 한다.
지적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도 보여 줄 수 있는, 자신이 보는 빛이나 어둠에 대한 단순한 충실함을 선택해야 한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비전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발표 자료가 되고, 성실함만 있고 새로 향할 곳이 없으면 반복이 된다.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을 새롭게 이루려는가”와 “그것을 위해 실제로 무엇을 견디고 행동하는가”가 만날 때 생긴다.
성과평가도 두 축을 나눠 봐야 한다. 큰 말을 잘하는 사람과 묵묵히 버티는 사람 가운데 한쪽만 이상적인 인재로 만들면, 조직은 방향 없는 실행이나 실행 없는 방향에 갇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