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습관으로 고통받는 것은 당사자뿐이 아니다. 아내와 자녀, 친구와 친척, 심지어 기차나 합승마차에 함께 앉은 사람까지 피해를 본다.
누군가 자기 ‘일’이라고 부르는 것에 영원히 헌신하려면 다른 많은 일을 영원히 외면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일이 그가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편견 없이 평가한다면 삶이라는 극장에서 맡을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훌륭하며 유익한 역할 중 상당수는 돈을 받지 않는 배우가 맡고, 세상에서는 그런 역할을 게으름의 한 형태로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 극장에서는 무대를 거니는 신사, 노래하는 하녀, 오케스트라에서 부지런히 악기를 켜는 사람만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객석에서 구경하고 손뼉 치는 사람도 실제로 한몫하며 전체 공연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는 변호사와 주식 중개인의 보살핌에 크게 의지한다. 경비원과 신호수는 우리를 빠르게 이곳저곳으로 옮겨 주고, 경찰관은 우리를 지키려고 거리를 걷는다. 하지만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우리를 웃게 하고 저녁 식사 자리를 좋은 동행으로 풍성하게 해준 또 다른 은인에게도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가?
뉴컴 대령은 친구가 돈을 잃는 데 한몫했고, 프레드 베이엄에게는 남의 셔츠를 빌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둘은 반스 씨보다 마주치기 좋은 사람들이었다. 폴스타프는 술을 절제하지도 정직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보다 세상에 없어도 좋았을 침울한 바라바를 한두 명쯤 댈 수 있다.
해즐릿은 자신에게 봉사라고 부를 만한 일을 한 번도 해주지 않은 노스코트에게, 생색내는 친구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빚을 느꼈다고 썼다. 좋은 말벗이야말로 가장 큰 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고통과 어려움을 감수해 호의를 베풀어야만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색한 심성이다.
어떤 사람이 편지지 여섯 장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 보낼 수도 있다. 또는 그의 글을 읽으며 즐겁고 어쩌면 유익한 30분을 보낼 수도 있다. 그가 악마와 계약이라도 하듯 심장의 피로 원고를 썼다면 그 도움이 더 커졌을까? 독자의 성화가 지긋지긋하다며 내내 저주하면서 쓴 편지라면 더 고마워해야 할까?
즐거움은 의무보다 유익하다. 자비와 마찬가지로 억지로 짜내지 않으며,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함께 축복하기 때문이다. 입맞춤에는 언제나 두 사람이 필요하고, 농담 하나에는 스무 명이 함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희생이 끼어드는 곳에서는 고통스럽게 호의를 베풀고, 너그러운 사람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는다.
우리는 ‘행복해야 할 의무’만큼 낮게 평가하는 의무가 없다. 행복한 사람은 이름 없는 선행의 씨앗을 세상에 뿌린다. 그 혜택은 당사자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남는다. 드러나는 날이 와도 가장 놀라는 사람은 그것을 베푼 본인이다.
얼마 전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인 소년이 구슬 하나를 쫓아 거리를 달렸다. 어찌나 즐거워 보였는지 스쳐 간 모든 사람의 기분이 좋아졌다. 그중 평소보다 더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난 한 사람이 소년을 멈춰 세우고 돈을 건네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면 가끔 이런 일도 생긴단다.”
전에도 즐거워 보였던 소년은 이제 즐거운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나는 우는 아이보다 웃는 아이를 격려하는 이런 행동을 옳다고 본다. 눈물에 돈을 내고 싶은 곳은 무대뿐이다. 반대쪽 상품이라면 얼마든지 크게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행복한 남자나 여자를 만나는 일은 5파운드 지폐를 줍는 것보다 낫다. 그들은 선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중심이다. 그들이 방에 들어오면 촛불 하나가 더 켜진 듯하다.
그들이 유클리드의 47번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나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삶이 살아 볼 만하다는 위대한 정리를 몸으로 증명한다.
따라서 게으르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게으른 상태로 남아야 한다. 혁명적인 교훈이다. 하지만 굶주림과 구빈원이 버티고 있으니 쉽게 악용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는 도덕 전체에서 가장 논박하기 어려운 진리 가운데 하나다.
행복은 이름 없는 공공재다

부지런한 사람 한 명을 잠깐 바라보자. 그는 서두름을 뿌려 소화불량을 거둔다. 엄청난 활동을 이자 붙여 빌려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신경쇠약을 받는다.
그는 사람들과 완전히 떨어져 납으로 만든 잉크병과 실내화를 두고 다락방에서 은둔하거나, 온 신경을 바짝 조인 채 사람들 사이로 빠르고 사납게 뛰어들어 성질을 한번 쏟아낸 다음 다시 일하러 간다.
그가 얼마나 많이, 얼마나 훌륭하게 일하는지는 관심 없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이들의 삶에 나쁜 요소다. 차라리 그가 죽으면 주변 사람은 더 행복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까다로운 심기를 견디는 것보다 ‘에두르기 부서’에서 그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포기하는 편을 더 쉽게 여길 것이다.
그는 우물의 근원에서부터 삶을 오염시킨다. 짜증 많은 삼촌에게 날마다 시달리느니 망나니 조카에게 한 번에 빈털터리가 되는 편이 낫다.
대체 이 모든 소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무엇 때문에 자기 삶과 남의 삶을 쓰라리게 만드는가?
한 사람이 한 해에 글을 세 편 내든 서른 편 내든, 평생 그리던 거대한 우의화를 완성하든 말든 세상에는 거의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삶의 대열은 이미 가득 차 있다. 천 명이 쓰러져도 그 틈으로 들어갈 사람은 늘 있다.
사람들이 잔 다르크에게 집에서 여성의 일을 돌봐야 한다고 말하자 그는 실을 잣고 빨래할 사람은 많다고 대답했다. 그토록 드물다는 당신의 재능도 마찬가지다.
자연이 “한 사람의 삶에 그토록 무심하다면” 어째서 우리 삶만 유별나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정성껏 키워야 하는가?
어두운 어느 밤 토머스 루시 경의 사냥터에서 셰익스피어가 머리를 얻어맞아 죽었다고 해 보자. 세상은 더 낫거나 더 나쁜 모습으로 계속 굴러갔을 것이다. 물동이는 우물로 가고, 낫은 밀밭으로 가고, 학생은 책으로 갔을 것이다. 무엇을 잃었는지 아무도 몰랐겠지.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에게 담배 1파운드 값보다 더 가치 있는 작품은, 다른 선택지까지 모두 생각해 보면 그리 많지 않다. 세속의 허영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생각이다.
담배 장수조차 이 표현에서 자기 자랑을 크게 할 이유는 찾지 못할 것이다. 담배가 훌륭한 진정제이기는 하지만 소매로 파는 데 필요한 자질 자체는 드물지도 귀하지도 않으니까.
아, 어떻게 생각하든 한 개인의 봉사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없다. 아틀라스도 사실은 악몽을 아주 오래 꾼 신사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해서 큰 재산을 만들고, 거기에서 곧장 파산법원까지 가는 상인을 본다. 별것 아닌 글을 계속 끼적여 주변 사람 모두에게 성가신 성격이 되어 버린 글쟁이도 있다. 마치 파라오가 이스라엘인에게 피라미드 대신 바늘 하나를 만들라고 시킨 듯하다. 훌륭한 젊은이는 몸이 쇠약해질 때까지 일하고, 마침내 흰 깃털을 단 영구차에 실려 간다.
그들은 의전 담당자에게서 자신에게 중대한 운명이 약속됐다는 말을 귓속말로 들은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가? 자기들의 익살극이 벌어지는 이 미지근한 탄환이 온 우주의 과녁 한가운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엇을 위해 값을 매길 수 없는 젊음을 내놓는지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 목표는 환상에 불과하거나 해로운 것일 수 있다. 기다리던 영광과 부는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막상 왔을 때는 아무 관심도 없을 수 있다. 그들과 그들이 사는 세계는 너무나 미미해서 생각만 해도 정신이 얼어붙는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스티븐슨은 무책임을 찬양하지 않는다. 돈으로 거래되지 않지만 조직과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일을 보라고 요구한다. 동료를 웃게 하는 사람, 새 구성원이 말을 꺼낼 수 있게 분위기를 푸는 사람, 회의의 긴장을 낮추는 사람은 산출물 표에 기록되지 않아도 팀의 성능을 바꾼다.
창업가는 자신이 없으면 회사가 멈춘다는 믿음에서 자부심을 얻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모든 결정과 관계가 몰린 조직은 헌신적인 조직이 아니라 취약한 조직이다. 쉬어도 굴러가는 시스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역할, 성과만큼 회복을 인정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창업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