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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7 · 07

6부 정치적 자유보다 도덕적 자유

미국은 자유를 위한 싸움이 벌어질 무대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는 자유가 단지 정치적인 의미일 수는 없다.

미국인이 정치적 폭군에게서 자신을 해방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경제적이고 도덕적인 폭군의 노예다. 공화국, 곧 res-publica인 공적 상태를 정리했다면 이제 res-privata인 사적 상태를 돌볼 때다.

로마 원로원이 집정관에게 명령한 문구를 바꿔, “사적인 상태가 어떤 손해도 입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우리는 이곳을 자유인의 땅이라고 부르는가. 조지 왕에게서 벗어나 편견 왕의 노예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롭게 태어나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도덕적 자유를 얻는 수단이 아니라면 정치적 자유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노예가 될 자유인가, 자유로울 자유인가.

우리는 자유의 가장 바깥 방어선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인의 나라다. 어쩌면 손자의 손자쯤 되어야 진정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부당하게 세금을 매긴다. 우리 안에는 대표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표 없는 과세다. 우리는 자신 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온갖 바보와 가축을 주둔시킨다. 거친 몸을 가난한 영혼 위에 머물게 해, 몸이 영혼의 재산을 모두 먹어 치울 때까지 둔다.

진정한 문화와 인간다움에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지방 사람이지 대도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조너선’, 곧 전형적인 미국인일 뿐이다.

우리는 기준을 고향 안에서 찾지 못하므로 지방적이다.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반영을 숭배한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무역과 상업, 제조업과 농업 따위에 배타적으로 헌신한 탓에 휘고 좁아졌다.

영국 의회도 지방적이다. 더 중요한 질문, 가령 아일랜드 문제가 생기면 시골뜨기 본색을 드러낸다. 그런데 왜 영국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본성은 하는 일에 길들었다. 그들의 ‘좋은 교육’은 부차적인 대상만 존중한다. 더 높은 지성과 비교하면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예절도 서투름과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 예절은 지난 시대의 유행, 궁정의 몸짓과 무릎 버클, 짧은 바지처럼 낡은 것으로 보인다. 예절의 장점이 아니라 결함은 성품이 계속 그곳을 떠난다는 데 있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돌아가야 할 존중을 요구하는 벗어 놓은 옷과 껍데기다.

당신은 속살 대신 껍데기를 받는다. 어떤 물고기는 속살보다 껍데기가 더 값지다는 사실도 대개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자기 예절을 내게 밀어 넣는 사람은 내가 그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데도 진기한 물건을 모은 장식장을 소개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과 같다.

시인 토머스 데커가 그리스도를 “숨을 쉰 최초의 진정한 신사”라고 부른 것은 이런 뜻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정도 지방적이다. 로마의 일이 아니라 알프스 너머 지방의 이해관계만 논의할 권한을 가졌다. 영국 의회와 미국 의회의 주의를 빼앗는 문제는 법무관이나 지방 총독 한 명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입법이라니. 나는 그것이 존경할 만한 직업인 줄 알았다. 세계사에는 하늘이 낸 누마, 리쿠르고스, 솔론이 있었다. 적어도 그 이름은 이상적인 입법자를 상징할 수 있다.

그런데 노예의 번식을 ‘규제’하거나 담배 수출을 다루는 법을 만든다고 생각해 보라. 신성한 입법자가 담배의 수출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인간적인 입법자가 노예의 번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 문제를 신의 어떤 자녀에게 제출했다고 하자. 19세기에는 신의 자녀가 없는가. 그 가족은 끊겼는가. 어떤 상태로 돌려받을 것인가.

노예와 담배가 주요한 생산품이었던 버지니아 같은 주는 마지막 날 자신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그런 주를 사랑할 애국심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 사실은 주가 직접 발표한 통계표에서 가져왔다고 소로는 밝힌다.

견과와 건포도를 찾아 모든 바다를 흰 돛으로 덮고, 그 목적을 위해 선원을 노예로 만드는 무역이라니.

며칠 전 난파해 많은 사람이 죽은 배를 보았다. 넝마와 향나무 열매, 쓴 아몬드 화물이 해변에 흩어져 있었다. 향나무 열매와 쓴 아몬드를 나르려고 리보르노와 뉴욕 사이 바다의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거의 없어 보였다.

미국은 쓴맛을 얻으려고 구세계로 보낸다. 이곳에서 삶의 잔을 넘기게 하려면 바닷물과 난파의 쓴맛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는 무역의 상당 부분이 이와 같다. 진보와 문명이 바로 이런 교환과 활동, 당밀 통 둘레를 도는 파리 같은 활동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눈먼 이들이 자신을 정치가와 철학자라 부른다.

한 사람은 “인간이 굴이라면 괜찮겠지”라고 말한다. 나는 “인간이 모기라면 괜찮겠지”라고 답한다.

우리 정부는 아마존을 탐사하고 노예제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윌리엄 헌던 중위를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 “삶의 안락함을 알고, 나라의 거대한 자원을 끌어낼 인위적 욕구를 가진 근면하고 활동적인 주민”이 부족하다고 관찰했다.

그러나 장려해야 할 ‘인위적 욕구’란 무엇인가. 그의 고향 버지니아의 담배와 노예 같은 사치 사랑도, 뉴잉글랜드의 얼음과 화강암 같은 물질적 부도 아니다. ‘한 나라의 거대한 자원’은 그것을 만들어 내는 비옥하거나 메마른 땅도 아니다.

내가 가 본 모든 주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주민의 높고 진지한 목적이었다. 그것만이 자연의 ‘거대한 자원’을 끌어내고, 마침내 자원의 한계 너머까지 요구한다. 인간은 자연에서 생겨나 자연 속에서 죽는다.

감자보다 문화를, 사탕보다 깨달음을 더 원할 때 세계의 거대한 자원이 사용된다. 그 결과인 주요 생산물은 노예도 노동자도 아닌 인간, 곧 영웅과 성인, 시인과 철학자, 구원자라 불리는 희귀한 열매가 된다.

한마디로 바람이 잠잠한 곳에 눈더미가 쌓이듯, 진실이 잠잠한 곳에 제도가 솟아난다. 그러나 진실은 계속 그 위로 불고 마침내 그것을 무너뜨린다.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비교적 너무 피상적이고 비인간적이어서, 나는 실제로 그것이 나와 관계있다고 제대로 인정한 적이 거의 없다.

신문은 몇 칸을 정치나 정부에 특별히 무료로 내준다. 그것이 정치가 살아남는 유일한 이유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문학을 사랑하고 어느 정도는 진실도 사랑하므로 그 칸을 읽지 않는다. 옳음을 느끼는 감각을 그만큼 무디게 만들고 싶지 않다.

대통령의 메시지 한 편도 읽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제국과 왕국과 공화국이 개인의 문 앞에 구걸하러 와서 팔꿈치 곁에서 불평하는 이상한 시대다. 신문을 집어 들 때마다 힘에 부쳐 쓰러지기 직전인 어떤 비참한 정부가 독자인 내게 자신에게 투표해 달라고 간청한다. 이탈리아의 거지보다 더 끈질기다.

그 정부는 영어 한마디 못 하므로, 친절한 상점 직원이나 바다 건너 데려온 선장이 만들어 준 증명서를 볼 수 있다. 아마 베수비오산 분화나 포강 범람이 정부를 이런 상태로 만들었다는 진짜 또는 가짜 사연을 읽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자리나 구빈원을 권한다. 아니면 내가 대개 그러듯 성 안에서 조용히 지내면 어떤가.

가엾은 대통령은 인기 유지와 의무 수행 사이에서 완전히 어리둥절해졌다. 신문이 지배 권력이다. 다른 정부는 인디펜던스 요새의 해병 몇 명으로 줄었다. 한 사람이 《데일리 타임스》를 읽지 않으면 정부는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요즘 유일한 반역은 신문을 읽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치와 일상의 절차처럼 지금 사람의 주의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중요한 기능이 맞다. 그러나 몸의 해당 기능처럼 무의식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인간 이하의 것, 일종의 식물적 작용이다.

나는 병든 사람이 소화 작용 일부를 의식하다 소화불량을 느끼듯, 주위에서 이 일이 진행되는 것을 반쯤 의식한 채 깨어날 때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이 창조의 거대한 모래주머니에 갈리는 것 같다.

정치는 사회의 모래주머니다. 모래와 자갈로 가득하고, 두 정당은 서로 마주 보는 양쪽 절반이다. 때로는 넷으로 갈라져 서로를 간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만성 소화불량에 걸렸고, 어떤 종류의 웅변으로 그것을 표현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단지 잊는 일이 아니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분명 의식하지 말았어야 할 것을 상당 부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늘 소화불량 환자처럼 만나 나쁜 꿈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때로는 소화가 잘되는 사람으로 만나 영원히 장엄한 아침을 서로 축하하면 안 되는가. 나는 분명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회사의 자유는 구성원의 자유로 검증된다

소로는 독립한 국가 안에서도 사람이 경제와 편견의 노예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회사도 비슷하다. 유연근무와 자율을 선언하면서 목표를 거부할 권한은 없고, 퇴근 뒤 알림에 답해야 하며, 주식 가치 때문에 문제를 말하지 못한다면 이름만 자유롭다.

그의 정치 혐오는 그대로 따를 수 없다. 정치는 노예제와 노동 조건, 환경 비용을 누가 지는지 결정하는 장치다. 개인의 도덕적 순수함만 강조하면 제도를 바꿀 책임을 사적인 생활 관리로 줄일 수 있다. 더구나 ‘노동자’와 영웅·시인을 대립시킨 표현은 일상의 노동을 낮춰 보는 계급적 시선을 품는다.

조직의 res-privata, 곧 개인 상태를 점검하라. 구성원이 불이익 없이 반대할 수 있는가, 근무 시간과 사생활의 경계가 있는가, 보상과 승진 기준이 공개되어 있는가, 제품의 외부 비용을 의사결정에 넣는가. 회사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공적 성취는 그 안의 사람이 자유롭게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다. 매출과 제도는 수단이고, 목적은 고객과 구성원이 더 나은 판단과 삶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