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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17 · 03

2부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우리 마을 변두리에 거칠고 떠들썩하게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초원 가장자리 언덕 아래에 축대를 세우려 한다. 어떤 힘이 그를 사고 치지 않게 붙들어 두려고 이 생각을 머리에 넣어 준 모양이다. 그는 내가 3주 동안 함께 땅을 파기를 바란다.

결과라야 그가 조금 더 많은 돈을 쌓아 두고, 뒤에 상속인들이 어리석게 쓰도록 남기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그 일을 하면 대부분은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이라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돈은 거의 되지 않아도 실제 이익은 더 큰 어떤 일에 몸을 바치기로 한다면 나를 게으름뱅이로 볼 수 있다.

나는 의미 없는 노동이라는 경찰이 나를 단속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에게나 정부에 재미있을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칭찬할 만하다고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서 내 교육을 마치고 싶다.

하루의 절반을 숲을 사랑해 걷는 사람은 빈둥거리는 사람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반면 온종일 투기꾼이 되어 숲의 털을 밀고 대지를 때 이르게 대머리로 만들면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시민으로 존경받는다. 마치 마을이 숲에서 원하는 일이 베어 내는 것뿐인 듯하다.

사람들은 임금을 받기 위해 돌을 담 너머로 던졌다가 다시 던져 오라는 일을 맡기면 모욕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지금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여름 아침 해가 뜬 직후, 나는 이웃 한 사람이 소 떼 옆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소들은 축 아래에 매단 무거운 다듬은 돌을 천천히 끌었다. 하루 일이 시작되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그 광경은 게으른 이들을 꾸짖는 근면의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는 소의 어깨 옆에서 멈추어 서서, 소들이 자기보다 한 몸 길이 앞서 가는 동안 자비로운 채찍을 멋지게 휘둘렀다.

나는 생각했다. 미국 의회가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노동이 바로 이것이구나. 정직하고 남자다운 수고, 하루가 긴 만큼 정직한 노동, 빵맛과 사회를 달콤하게 하는 노동, 모두가 존중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노동이다. 반드시 해야 하지만 고된 일을 맡은 신성한 무리의 한 사람이다.

창문 안에서 그를 보고 비슷한 일로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하루가 지나 저녁에 다른 이웃의 뜰을 지났다. 하인을 많이 두고 돈을 어리석게 쓰며 공동의 몫에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침의 돌은 그 집을 꾸미려고 만든 기묘한 구조물 옆에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에서 마부의 노동이 가진 위엄은 사라졌다. 태양은 이것보다 가치 있는 수고를 비추려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덧붙이자면 그 고용주는 나중에 마을 여러 사람에게 빚을 진 채 달아났다. 형평법 법정을 거친 뒤 다른 곳에 자리 잡아 다시 한 번 예술의 후원자가 되었다.

돈을 얻는 길은 거의 예외 없이 아래로 향한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무언가를 했다면 참으로 게으르게 살았거나 그보다 나빴던 것이다. 노동자가 고용주가 주는 임금만 얻었다면 그는 속은 것이고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글이나 강연으로 돈을 벌려면 인기를 얻어야 하고,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은 수직으로 내려가는 일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공동체가 가장 쉽게 돈을 내는 서비스는 대개 제공하기 가장 불쾌한 것이다. 사람은 한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국가도 천재에게 더 현명하게 보상하지 않는다. 계관시인조차 왕실의 우연한 사건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포도주 한 통으로 매수되고, 다른 시인은 자기 뮤즈를 떠나 그 통의 용량을 재러 불려 간다.

내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 종류의 측량을 고용주는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을 거칠게 하고, 너무 잘하지 않기를, 실은 충분히 잘하지 않기를 바란다. 측량 방식이 여러 가지라고 설명하면 무엇이 가장 정확한지가 아니라 어느 방식이 자기 땅을 가장 넓게 만들어 주는지 묻는다.

나는 장작을 재는 규칙을 고안해 보스턴에 도입하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곳의 측정 담당자는 판매자들이 장작을 정확하게 재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도 이미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정확하므로, 판매자들은 다리를 건너기 전 찰스타운에서 재고 온다는 것이다.

노동의 목표는 생계를 얻고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있지 않고, 특정한 일을 잘 해내는 데 있어야 한다. 돈의 관점만 보더라도 마을은 노동자가 단지 먹고살기 같은 낮은 목적 때문에 일한다고 느끼지 않고, 과학적이고 심지어 도덕적인 목적을 위해 일한다고 느낄 만큼 충분히 보상하는 편이 경제적이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지 말고 그 일을 사랑해 하는 사람을 고용하라고 소로는 말한다.

자기 마음에 맞는 일을 훌륭히 하고 있어도 약간의 돈과 명예로 현재의 길에서 사들일 수 없는 사람은 드물다. 광고는 ‘활동적인’ 젊은이를 구한다. 활동성이 젊은 사람이 가진 자본 전부인 듯하다.

어떤 이는 다 자란 내게 자기 사업에 함께하자고 자신 있게 제안했다.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삶 전체를 실패한 것처럼 보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의심스러운 칭찬인가.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을 거슬러 가지만 아무 데도 향하지 않는 나를 만나 자기 배에 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탔다면 보험업자는 뭐라고 하겠는가.

아니다. 항해의 이 지점에서 나는 일 없이 떠도는 사람이 아니다. 소년 시절 고향 항구를 어슬렁거리다 튼튼한 선원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고, 나이가 차자 곧 배에 올랐다.

공동체에는 지혜로운 사람을 유혹할 뇌물이 없다. 산을 뚫을 만큼 많은 돈을 모을 수는 있어도 자기 일을 돌보는 사람을 고용할 만큼 많은 돈은 모을 수 없다. 유능하고 가치 있는 사람은 공동체가 돈을 주든 말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무능한 사람은 자기 무능을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이에게 내놓고 늘 자리를 얻기를 기다린다. 그들은 좀처럼 실망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자유를 보통 사람보다 더 질투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와 나의 연결과 의무는 아직 가볍고 일시적이라고 느낀다. 생계를 주고 동시대인에게 얼마간 쓸모 있다고 인정받게 하는 작은 일도 아직은 대개 즐겁다. 그것이 필수라는 사실을 자주 떠올리지 않는다. 이만하면 성공했다.

하지만 욕구가 크게 늘면 그것을 채우는 노동이 고역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많은 이처럼 오전과 오후를 모두 사회에 판다면 내게는 살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고 싶지 않다.

사람은 아주 부지런하면서도 시간을 잘못 쓸 수 있다. 삶의 대부분을 생계 마련에 소모하는 사람보다 치명적으로 잘못 계산하는 이는 없다. 위대한 사업은 스스로를 부양한다. 시인은 대패 공장에서 나온 나무 부스러기로 보일러를 때듯 자기 시로 몸을 부양해야 한다. 사랑함으로써 살아갈 방편을 얻어야 한다.

상인 백 명 중 아흔일곱이 실패한다는 말이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사람의 삶도 대개 실패했고 파산이 예고되어 있다.

재산 상속인으로 세상에 나온 것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산된 것에 가깝다. 숨을 쉬는 한 친구의 자선이나 정부 연금으로 부양받는 관계를 아무리 멋진 동의어로 꾸며도 구빈원에 들어간 셈이라고 소로는 독설한다.

가난한 채무자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재고를 조사하고, 지출이 수입보다 컸음을 확인한다. 특히 가톨릭교회에서는 형평법 법정에 간 사람처럼 말끔히 고백하고 모두 내놓은 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등을 대고 누워 인간의 타락을 말하면서 일어나려고 애쓰지 않는다.

삶에 요구하는 수준에서도 두 사람은 크게 다르다. 한 사람은 모든 표적을 수평으로 쏴 맞힐 수 있는 평평한 성공에 만족한다. 다른 사람은 삶이 낮고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수평선에서 아주 작은 각도나마 계속 조준점을 높인다. 나는 후자가 되고 싶다. 동양의 격언은 “늘 아래를 보는 사람에게 위대함은 다가오지 않고, 높이 보는 이는 모두 가난해진다”고 한다.

먹고사는 일을 어떻게 정직하고 명예로울 뿐 아니라 매력적이고 영광스럽게 만들지, 기억할 만한 글은 거의 없다. 생계를 얻는 일이 그렇지 않다면 삶도 그럴 수 없다. 문학만 보면 이 질문이 단 한 사람의 사색도 괴롭힌 적 없는 듯하다. 자기 경험이 너무 역겨워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우주의 창조자가 그토록 애써 가르친 돈의 가치라는 수업을 우리는 통째로 건너뛴다. 개혁가를 포함한 모든 계층은 생활 수단에 놀랄 만큼 무심하다. 물려받든, 벌든, 훔치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회는 이 점에서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한 것을 다시 망쳤다. 추위와 배고픔이 그것을 피하려고 사람들이 채택하고 권하는 방식보다 내 본성에는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

‘현명한 사람’이라는 호칭은 대부분 잘못 쓰인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사는 법을 모른다면, 단지 더 교활하고 지적으로 미묘할 뿐이라면 어떻게 현명한가. 지혜는 쳇바퀴에서 일하는가. 아니면 자기 본보기로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가. 삶에 적용되지 않는 지혜가 존재하는가. 지혜는 가장 고운 논리를 가는 방앗간 주인에 불과한가.

플라톤은 동시대인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더 성공적으로 생계를 얻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처럼 삶의 어려움에 굴복했는가. 무심함과 거만한 태도로 어려움을 이긴 듯 보였을 뿐인가. 숙모가 유언장에 이름을 적어 주어 살기 쉬웠던 것인가.

대다수가 생계를 얻는 방식, 곧 살아가는 방식은 임시방편이며 삶의 진짜 일을 피하는 수단이다. 무엇이 나은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부는 더 낫게 살 뜻이 없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사랑만으로 일하라는 말이 가릴 수 있는 것

소로는 노동의 가치를 임금과 분리해 묻는다. 바쁘고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일이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니며, 자연과 삶을 파괴하는 투기가 ‘진취성’으로 칭찬받는 역설을 찌른다. 매출을 만들지만 고객을 해치고 구성원을 소진시키는 기능, 아무도 쓰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유지되는 프로젝트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돈이 아니라 사랑으로 일하는 사람을 고용하라”를 채용 원칙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랑과 사명은 공정한 임금을 대신하지 못한다. 경제적 안전망과 돌봄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무급 헌신을 요구하면 특권을 노동 윤리로 포장하게 된다. 소로 자신도 생계를 위한 측량과 강연을 했다.

현대적인 질문은 돈과 의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고객과 사회에 실제 가치를 만드는가, 그 가치를 만드는 사람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가, 일 바깥의 삶이 남는가를 함께 묻는 것이다. ‘미션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문구 뒤에 낮은 임금과 끝없는 근무를 숨기지 말라. 좋은 일은 사랑할 수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거절하고 쉬고 떠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