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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ATIONS 003 · 03

2장 남는 부를 쓰는 세 가지 방법

남는 부가 가는 세 길

남는 부를 처분하는 방법은 셋뿐이다. 첫째, 죽은 뒤 가족에게 남긴다. 둘째, 공공의 목적에 쓰도록 유증한다. 셋째, 재산을 가진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직접 운용한다. 지금껏 소수에게 모인 세계의 부는 주로 첫째와 둘째 방법으로 처리됐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방법은 가장 현명하지 못하다. 군주국에서는 부모가 자기 이름과 작위가 다음 세대에도 온전히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허영심을 채우려 한다. 그래서 토지와 재산의 대부분을 맏아들에게 남긴다. 오늘날 유럽의 세습 계급이 놓인 형편을 보면 이 희망과 야망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상속자는 어리석은 행동을 거듭하거나 땅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가난해졌다. 영국의 엄격한 한정상속법조차 세습 계급을 지켜 주지 못했다. 토지는 빠르게 낯선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공화국에서는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방식이 훨씬 공정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사람은 왜 자녀에게 거대한 재산을 남겨야 하는가? 애정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방향을 잘못 잡은 애정은 아닌가? 경험에 따르면 그런 짐을 지우는 일은 대체로 자녀에게 좋지 않다. 국가에도 이롭지 않다.

아내와 딸이 살아갈 적당한 소득을 마련하고 아들에게는 있어도 아주 적은 생활비만 남기는 선을 넘을 때에는 망설여야 한다. 큰 유산은 받는 사람에게 이익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는 사실을 이제 의심하기 어렵다. 현명한 사람은 가족과 국가 양쪽의 이익을 생각할 때 이런 상속이 재산을 잘못 쓰는 길이라는 결론에 곧 이른다.

편집자 주 — 아내와 딸은 부양하고 아들은 독립시켜야 한다는 구분은 19세기 미국의 성 역할과 재산권을 반영한다. 오늘날에는 성별이 아니라 실제 돌봄 관계와 당사자의 자립 조건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들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도록 가르치지 못한 부모가 그를 빈곤 속에 내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아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도록 키웠다면, 또는 칭찬할 만하게도 돈 걱정 없이 공익을 위해 일하게 가르쳤다면 부모는 당연히 알맞은 생활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 부에 망가지지 않고 부유한 몸으로 지역사회에 큰일을 해낸 백만장자의 아들도 있다. 그들은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이다. 귀중하지만 안타깝게도 드물다.

판단할 때는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결과를 봐야 한다.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 보통 어떻게 되는지 살핀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곧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들에게 전능한 달러를 남기느니 저주를 남기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큰 유산을 남기게 한 힘이 자녀의 행복이 아니라 가문의 자존심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된다.

죽은 뒤 공공에 남기는 길

둘째는 죽을 때 재산을 공공의 목적에 남기는 방법이다. 세상에 큰 이로움을 주려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나 맞는 방식이다. 지금까지 유증된 재산이 어떻게 쓰였는지 보면 사후의 선행이 큰 성과를 거두리라는 밝은 희망을 품기 어렵다. 유언자가 바라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사례가 적지 않다. 진짜 뜻이 좌절된 일도 많다. 어떤 유산은 결국 그 사람의 어리석음을 기리는 기념물로만 남았다.

부를 모을 때 쓴 능력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해야 재산이 지역사회에 참된 이익을 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한 일을 두고 칭송할 수는 없다. 죽으면서 돈을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지역사회가 그에게 감사해야 할 까닭도 없다. 이런 식으로 거액을 남긴 사람은 가져갈 수만 있었다면 한 푼도 두고 가지 않았을 사람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 선물에는 베푸는 품격이 없으므로 감사 속에 기억되기 어렵다. 이런 유증이 좀처럼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상속세라는 판단

죽을 때 남긴 거대한 재산에 더 무거운 세금을 물리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는 여론이 건강한 쪽으로 바뀐다는 반가운 신호다. 펜실베이니아주는 몇 가지 예외를 빼고 주민이 남긴 재산의 10분의 1을 가져간다. 최근 영국 의회에 제출된 예산안은 상속세를 올리자고 한다. 더 뜻깊은 점은 새 세금이 누진세라는 사실이다. 모든 세금 가운데 이것이 가장 현명해 보인다.

큰돈이 생겨난 지역사회를 위해 잘 썼다면 유익했을 텐데도 평생 쌓아 두기만 한 사람에게는 국가의 모습으로 나타난 공동체가 자기 몫을 빼앗긴 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야 한다. 국가는 사망한 사람의 재산에 무거운 세금을 매겨 이기적인 백만장자의 볼품없는 삶을 꾸짖는다.

각국은 이 방향으로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 부자가 죽을 때 국가를 거쳐 공중에게 돌아갈 재산의 몫에 어디까지 한계를 두어야 할지 정하기조차 어렵다. 세금은 반드시 누진적이어야 한다. 부양가족에게 남기는 적당한 액수에는 세금을 매기지 않다가 재산이 커질수록 빠르게 올려야 한다. 마침내 백만장자가 쌓아 둔 돈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샤일록에게 그랬듯 적어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나머지 절반은 국가의 금고로 들어간다.”

이렇게 과세하면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재산을 직접 운용하려 한다. 사회가 늘 바라야 할 목표도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에게 훨씬 큰 결실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업가 정신이 뿌리째 약해지고 사람들이 부를 쌓으려 하지 않게 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거대한 재산을 남겨 사후에도 이름이 오르내리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자기 재산에서 엄청난 세금이 국가로 넘어가는 일도 주목받을 기회로 여긴다. 적어도 그 야망이 조금은 더 고상하다.

살아서 쓰는 길

그러면 큰 재산을 쓰는 방법은 하나만 남는다. 이것이야말로 일시적인 부의 불평등을 풀 참된 해독제이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화해시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이상이라고 카네기는 말한다. 공산주의의 이상과도 다르다. 문명을 완전히 뒤엎지 않고 현 조건을 한 단계 더 진화시키기만 하면 된다. 지금의 강한 개인주의를 토대로 하며 인류가 뜻을 정하면 조금씩 실행할 준비도 돼 있다.

그 원칙 아래에서는 이상적인 국가가 생긴다. 소수가 가진 남는 부를 공동의 이익을 위해 운용하므로 가장 좋은 뜻에서 다수의 재산이 된다. 소수의 손을 거치는 이 부는 사람들에게 작은 액수로 나눠 줄 때보다 인류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훨씬 강한 힘이 된다. 가장 가난한 사람도 같은 시민 몇 명이 모은 큰돈을 공공 목적에 쓰고 대중이 주된 혜택을 얻는 편이, 여러 해에 걸쳐 아주 적은 돈을 흩어 주는 것보다 자신에게 더 가치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뉴욕에서 돈 없는 사람 가운데 배움에 뜻이 있는 이들이 쿠퍼 유니언에서 얻는 성과를 생각해 보자. 피터 쿠퍼가 같은 돈을 생전에 임금으로 나눠 줬다면 대중이 얻었을 성과와 비교해 보자.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지 자선이 아니므로 가장 높은 형태의 분배다. 그래도 두 결과를 견주면 지금의 부 축적 법칙 속에 인류를 개선할 어떤 가능성이 들어 있는지 어림할 만하다고 카네기는 본다.

그 돈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눴다면 상당 부분은 욕구를 채우는 데 쓰였고 일부는 지나치게 낭비됐으리라. 가장 잘 쓰인 몫이 가정의 편의를 늘렸다고 해도, 쿠퍼 유니언이 세대에서 세대로 가져올 성과와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견줄 만했을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폭력적이거나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 생각을 곰곰이 따져 보라고 권한다.

새뮤얼 틸던이 뉴욕의 무료 도서관을 위해 남긴 500만 달러도 예로 들 수 있다. 이 엄청난 돈을 틸던이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직접 제대로 운용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랬다면 소송이나 다른 지연 사유가 그의 뜻을 가로막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틸던의 수백만 달러가 마침내 뉴욕에 훌륭한 공공도서관을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책에 담긴 세계의 보물이 누구에게나 영원히 값없이 열리는 곳이다. 맨해튼섬과 그 둘레에 모여 사는 사람의 오래가는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 돈을 잘게 나눠 대중의 손에서 돌게 한 편이 더 나았겠는가? 가장 열렬한 공산주의자조차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는 사람 대부분은 아마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카네기는 단언한다.

우리 삶의 기회는 빈약하고 제한돼 있다. 시야는 좁고 가장 훌륭한 일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부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한 가지 행운에 감사해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사람이 오래 혜택을 누릴 사업을 짜고 운영할 힘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 삶도 품위 있게 만들 수 있다.

가장 높은 삶은 톨스토이 백작이 보여 준 것처럼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따라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품되 달라진 시대의 조건을 알아보고 그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뜻을 펼쳐야 한다. 가르침의 본질대로 여전히 동료를 위해 일하되 다른 방법으로 일하는 삶이다.

부자의 의무

그렇다면 부를 가진 사람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사치와 과시를 멀리하고 검소하며 꾸밈없이 사는 본을 보인다. 자신에게 딸린 사람이 정당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적당히 마련해 준다. 그런 뒤 들어오는 남는 소득은 모두 신탁 자금으로 여긴다. 자기 판단으로 지역사회에 가장 이로운 결과를 낼 방식에 따라 그 돈을 다루어야 할 엄격한 의무를 진다. 부자는 가난한 형제의 대리인이자 수탁자가 된다. 자신이 가진 더 나은 지혜와 경험, 운용 능력을 그들을 위해 쓰고 그들이 스스로 해낼 때보다 더 잘한다고 본다.

가족에게 남길 ‘적당한’ 액수가 얼마인지, 검소하고 꾸밈없는 생활이 무엇인지, 사치의 기준은 어디인지 정하기는 어렵다. 처지마다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정확한 액수나 행동을 정하는 일은 좋은 예절과 취향, 품행의 규칙을 정의하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그래도 이런 기준은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은 말로 정의하지 못해도 잘 안다. 여론은 무엇이 그 기준을 거스르는지 빠르게 알아차리고 불쾌하게 여긴다. 부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옷차림에서 좋은 취향을 판단하는 규칙을 여기에 적용해도 된다. 사람을 지나치게 눈에 띄게 만드는 것은 규범을 어긴다. 어떤 가족이 집과 식탁과 마차를 호화롭게 꾸미고 자신들에게 엄청난 돈을 과시하듯 쓰는 일로 주로 알려졌다면 그들의 성품과 교양을 판단하기 어렵지 않다. 남는 부를 쓰거나 남용하는 태도도 같은 판단을 받는다. 공공의 선을 위해 기꺼이 협력하는지, 끝까지 끊임없이 모아 쌓는지, 살아서 운용하는지 죽어서 남기는지를 본다. 판결은 가장 뛰어나고 깨우친 여론에 달려 있다. 공동체가 반드시 판단할 것이며 그 판단이 자주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카네기는 믿는다.

무분별한 자선

남는 부를 어디에 쓰는 것이 좋은지는 이미 드러났다. 현명하게 운용하려는 사람은 실제로 현명해야 한다. 인류가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는 큰 장애 가운데 하나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자선이기 때문이다. 게으른 사람, 술에 빠진 사람, 자격 없는 사람을 부추기는 데 쓰느니 부자의 수백만 달러를 바다에 버리는 편이 인류에게 낫다고까지 말한다.

오늘날 이른바 자선에 쓰는 1,000달러 가운데 950달러는 현명하지 못하게 쓰인다. 그 바람에 줄이거나 고치려 한 해악이 오히려 커진다고 카네기는 추정한다. 어느 유명한 철학 저술가는 친구 집을 찾아가던 길에 다가온 사람에게 25센트를 줬다고 털어놓았다. 그 사람의 습관도, 돈을 어디에 쓸지도 몰랐다. 그 돈이 잘못 쓰일 만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스스로 허버트 스펜서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날 밤 무심코 건넨 25센트가 앞으로 참된 자선으로 베풀 모든 돈의 선행보다 더 큰 해를 낳을지 모른다고 카네기는 본다. 자기 기분만 달랬고 귀찮은 상황에서 벗어났다. 다른 면에서는 훌륭한 사람이어도 그 행동은 그의 삶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나쁜 일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자선을 베풀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일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거드는 일이다. 나아지고 싶은 사람이 실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수단의 일부를 마련하고, 올라가려는 사람에게 올라설 발판을 준다. 거들어 주되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일은 드물어야 하며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단순한 시혜로는 개인도 인류도 나아지지 않는다.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도움을 요구하지 않는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사람은 사고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지 않는 한 그러지 않는다고 카네기는 단정한다.

물론 누구나 일시적인 지원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을 직접 알게 될 때가 있고 그런 경우를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개인에게 현명하게 줄 수 있는 액수에는 한계가 있다. 상대의 사정을 충분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움받을 만한 사람을 돕는 일만큼 자격 없는 사람을 돕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어쩌면 그보다 더 신중한 사람이 참된 개혁가라고 말한다. 시혜에서는 덕을 구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해보다 악덕에 상을 줘서 생기는 해가 더 클 수 있다는 생각이다.

편집자 주 — 카네기의 ‘자격 있는 빈자’와 ‘자격 없는 빈자’ 구분은 가난을 개인의 품성 탓으로 돌릴 위험이 크다. 오늘날의 사회보장과 재난 지원은 개인의 도덕성을 심사하는 자선과 달리 권리와 공동 위험의 원리에 서 있다.

백만장자는 수탁자다

결국 부자는 피터 쿠퍼, 볼티모어의 이넉 프랫, 브루클린의 찰스 프랫, 릴런드 스탠퍼드 상원의원 같은 사람을 따라야 한다. 그들은 올라가려는 사람이 디딜 사다리를 지역사회 가까이에 두는 일이 가장 좋은 길임을 알았다. 무료 도서관, 공원과 휴식 공간은 몸과 마음을 돕는다. 예술 작품은 즐거움을 주고 대중의 취향을 가꾼다. 여러 공공기관은 사람들의 전반적인 생활 형편을 개선한다. 이 방식으로 부자는 남는 부를 동료에게 가장 오래 이로운 형태로 돌려준다.

카네기는 이렇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본다. 축적의 법칙과 분배의 법칙은 자유롭게 두고 개인주의도 이어 간다. 다만 백만장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수탁자가 된다. 잠시 공동체가 늘린 부의 큰 몫을 맡은 뒤 공동체 스스로 하는 것보다 훨씬 잘 운용해 돌려준다.

인류의 가장 뛰어난 정신은 곧 이런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그는 내다본다. 사려 깊고 성실한 사람의 손에 남는 부가 흘러들었다면, 해마다 공동의 선에 쓰는 것 말고는 명예로운 처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단계다. 그날은 이미 밝아 오고 있다.

큰 사업에 자본이 묶여 있어 생전에 빼지 못했고 죽은 뒤 대부분 공익에 쓰이도록 한 사람이라면 동료의 연민을 사지 않고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살아서 마음대로 운용할 여지가 있었던 수백만 달러를 그대로 남기고 죽는 사람은 머지않아 “울어 주는 이도, 기리는 이도, 노래해 주는 이도 없이” 떠난다. 가져갈 수 없는 찌꺼기를 무슨 용도에 남겼는지는 상관없다. 대중은 이렇게 판결한다.

“그토록 부유하게 죽는 사람은 수치 속에 죽는다.”

카네기가 말하는 부의 참된 복음은 이것이다. 이 가르침을 따르면 언젠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가 풀리고 “땅에는 평화, 사람 사이에는 선의”가 찾아오리라고 믿는다.


스타트업 적용 노트 — 2026

여기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각은 ‘죽고 나서 좋은 곳에 쓰라’는 유언보다 ‘살아 있을 때 직접 책임지라’는 요구다. 창업자에게는 재단 설립만 뜻하지 않는다. 회사가 커진 뒤 지분 일부를 사회에 내놓겠다는 약속은 지금의 의사결정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매년 실제로 쓸 몫을 정하고, 받을 사람보다 해결할 문제를 먼저 고르며, 돈만 낸 뒤 이름을 붙이는 데서 멈추지 않는 편이 낫다. 다만 카네기의 수탁자 모델에는 큰 결함도 있다. 돈을 모은 사람이 대중보다 현명하다고 스스로 가정한다. 오늘의 기부와 임팩트 투자는 수혜 당사자를 결정 과정에 넣고 성과와 실패를 공개해야 한다. 좋은 뜻만으로 권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